연인과 '내밀한 대화'도?…현직 판사 "사실상 모든 걸 압수" 지적


#. A씨는 이웃인 B씨와 다툼 끝에 화를 이기지 못하고 B씨에게 거친 말을 여러 차례 문자로 보냈다. 또 B씨를 비방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리고 지인에게도 보냈다. 결국 B씨에게 고소당한 A씨는 수사 중 자신의 카카오톡과 이메일 등을 압수당했다. 그런데 A씨가 압수당한 카카오톡과 이메일에는 연인과의 내밀한 대화는 물론 일부 도덕적이지 못한 내용도 담겨 있었다. 수사기관이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다는 생각에 위축된 A씨는 불안에 시달렸다.

수사기관이 사실상 모든 전자정보를 압수할 수 있는 현행 압수수색 영장 실무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법원 내부에서 나왔다. 범죄와 관련 없는 내용을 제외하는 선별적 수색과 압수가 이뤄지도록 '압수수색 영장 사전심문'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취지다.

전국 법원 '영장전담법관 온라인 간담회' 개최…실무 공유

법원행정처는 1일 '압수수색 영장 실무 관련 논의를 위한 영장전담법관 온라인 간담회'를 열었다고 2일 밝혔다. 간담회에는 영장 발부 여부를 판단하는 전국 법원의 영장전담 판사들이 화상으로 참석했다.

발제를 맡은 법원행정처 형사지원심의관 정재우 판사(사법연수원 39기)는 A씨의 사례 등을 소개하며 "전자정보 압수·수색으로 인한 시민의 사생활 침해 위험이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정 판사는 "영장 상 '본건과 관련성이 인정되는'이라는 문구만으로는 사실상 압수 범위 제한이 불가하다"며 "사실상 철저한 선별도 어려워 일단 수사기관이 정보를 입수하는 것을 막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사실상 '모든 것'을 압수할 수 있는 영장이 발부되고 있다"며 "수사기관이 입수한 정보가 어떠한 방식으로 보관되는지, 무관 정보가 제대로 폐기되는지 알기도 어렵다"고 밝혔다.

최근 압수·수색영장 청구가 급증하고 있고 특히 휴대전화, 컴퓨터, 서버 등에 저장된 전자정보에 대한 압수·수색이 일반화되는 분위기라는 설명이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지난해 청구된 압수·수색 영장은 총 39만6671건이다. 2011년 10만8992건에 비해 3.6배나 증가했다. 같은 기간 발부율은 87.3%에서 91.1%로 역시 증가했다.

정 판사는 "압수수색 한 번 당한 사람은 평생 불안함에 떨며 살아야 한다는 말도 있다"며 "나쁜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논리만으로는 사생활 침해를 정당화하는 것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고 비판했다.

정재우 판사 "압수수색 영장 사전심문 제도 도입해야"


대법원. 연합뉴스

정 판사는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대법원이 형사소송규칙(대법원 규칙) 개정을 통해 추진하는 압수수색 영장 사전심문을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판사의 서면 심리 중 대상·범위·방법 등에 대한 의문점이 발생할 경우 이를 해소하거나 추가 심리를 할 방법이 없다"며 "담당 법관은 수사를 발목 잡는 부담감에 발부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게 되고, 과도한 압수수색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정 판사는 전자정보 압수·수색과 같이 대상이 광범위하고 범죄와 무관한 자료를 선별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추가 심리의 필요성이 더욱 크다고 밝혔다.

정 판사는 압수수색 영장 사전심문 제도가 도입되면 수사 밀행성이 침해된다는 수사기관의 주장에 대해서는 '피의자심문' 제도라는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대면 심리의 대상은 '피의자'가 아닌 영장을 신청·청구한 수사기관이며 심문 절차도 비공개로 진행돼 수사의 밀행성을 확보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취지다.

정 판사는 수사 지연을 초래한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복잡한 소수의 사안에 활용될 예정"이라며 "현재 영장 기각 후 재청구로 이어질 만한 사안은 제도가 도입되면 오히려 시간이 단축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대검 "피압수자 참여권 보장, 이미 실무상 확립"…도입 반대


대검찰청. 황진환 기자

한편 영장전담법관 온라인 간담회 소식을 접한 검찰은 "수사정보가 유출될 가능성은 높아지고, 증거가 인멸될 가능성도 높아질 수 밖에 없다"며 제도 도입에 반대 입장을 거듭 밝혔다.

대검찰청은 이날 입장문을 통해 "과거 영장 없이 수집했던 증거에 대해서도 현재는 영장을 발부받아야 압수할 수 있게 돼 영장 발부 건수가 증가한 것"이라며 "수사기관의 활동에 대한 법원의 통제는 오히려 강화된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압수·수색영장 판사의 기각률이 낮은 이유도 검사가 사법경찰관이 신청한 영장에 대해 소명자료가 부족하거나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에 보완수사를 요구하거나 영장을 기각하는 등 철저하게 사법통제를 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최근 2년간 사법경찰관이 신청한 압수·수색영장에 대한 검사 기각률(보완수사요구 포함)은 11%이고, 그 결과 사법경찰관의 압수.수색영장 신청 대비 법원의 발부율(일부 발부.일부 기각 포함)은 87.9%라고 덧붙였다.

대검은 또 압수 전 전자정보의 탐색 과정에서 범죄사실과 무관한 정보가 압수되지 않도록 이미 피압수자의 참여권이 보장돼 있고, 실무상 확립돼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대검은 "압수영장 발부 단계에서 판사가 수사기관이든 참고인이든 불러서 대면 심리한다고 해도 실제 압수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정을 예측할 수 없다"며 "사전에 전자증거의 압수 범위나 방법을 제한하는 것 또한 기술적으로 불가능함에도 대면 심리제를 도입하면 마치 수사기관의 무분별한 전자정보 압수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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