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반도체 '투톱'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사상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다. 두 기업의 올해 1분기 반도체 사업은 8조 원에 달하는 적자를 기록했다. 감산으로 가드를 올리고 반도체 한파의 칼바람을 버티며 하반기 업황 회복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기대를 모았던 한미 정상회담은 현안에 대한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결국 우리 기업은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경쟁 사이에서 지정학적 리스크를 떠안은 모양새다.
역대 최악의 성적표 받아 든 반도체 업계…일단은 감산으로 대응
29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1분기 실적발표를 통해 반도체 부문의 적자가 4조 5800억 원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삼성전자 반도체가 적자를 기록한 것은 2009년 1분기 7100억 원 이후 14년 만이다.
특히 글로벌 1위인 메모리는 물론 지난해 4분기 최고 실적으로 당시 반도체 실적을 간신히 흑자(2700억 원)로 이끈 파운드리까지 모두 적자에 빠진 것으로 분석된다. 시장은 1분기 메모리에서 4조 2천억 원대, 파운드리에서 3천억 원대의 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
SK하이닉스도 1분기 3조 4023억 원으로 사상 최악의 적자를 보였다. 전분기 1조 8984억 원의 적자에 이어 반년 만에 5조 원에 달하는 적자가 발생했다. SK하이닉스는 지난 26일 컨퍼런스콜에서 1분기 메모리 반도체 업황이 역대 가장 심각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감산'으로 불황에 대응하고 있다. 생산을 줄여 재고를 적정 수준까지 낮추며 수요 회복을 기다리는 전략이다.
하반기부터 수요 회복 전망…변수는 미중 패권경쟁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수요 회복이 하반기부터 시작할 것으로 전망했다.
시장 역시 2~3분기 실적이 바닥을 찍고 4분기 또는 내년 1분기 흑자 전환을 예상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2분기 반도체 사업에서 3조 원 중반대의 적자를 보인 뒤 빠르게 적자폭을 줄여나갈 것이란 전망이다.
이 같은 전망의 핵심 변수는 중국이 될 것으로 분석된다.
먼저 중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메모리 반도체 생산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삼성전자 시안 공장은 전체 낸드 생산의 40%를 담당하고 SK하이닉스의 우시 공장은 D램 생산의 40%, 다롄 공장은 낸드 생산의 20%를 맡고 있다. 두 기업 모두 패키징 공장도 가동 중이다.
또 우리나라 반도체 수출의 40%를 중국이 담당한다. 중국의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에도 우리나라 반도체가 좀처럼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이다.
1분기 수출은 전년 동기보다 19.5% 감소했는데, 대중국 수출이 29.6% 하락한 영향이 컸다. 덩달아 전체 수출액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도 지난해 18.9%에서 1분기 13.6%로 떨어졌다.
이런 상황의 배경 중 하나는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이 첫 번째로 꼽힌다. 미국은 반도체법을 통해 보조금을 지원 받는 조건으로 △초과수익 환수 △기업 기밀에 해당하는 정보 공개 △대중국 투자 제한(가드레일 조항) 등 '독소조항'을 내걸었다.
여기에 반도체 첨단장비의 대중국 수출을 금지했다. 우리나라 기업은 수출금지가 1년 유예됐지만 오는 10월 만료된다.
중국도 반격에 나섰다. '반도체 굴기'라며 자국 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SEMI(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는 '300mm(12인치) 팹(Fab‧반도체 공장) 전망'을 통해 중국이 2026년 생산능력 1위에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또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3위인 미국의 마이크론에 대한 '안보심사'에 나섰다. 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한 '경고 조치'라는 해석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마이크론의 중국 내 반도체 판매를 금지하면, 우리나라 기업이 그 부족분을 채우지 말아 달라고 미국이 우리 정부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미국과 중국이 반도체 패권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양자택일'하라는 압력이 거세지는 모습이다.
한미 정상회담, 지정학적 불확실성 해소 한계…개별 협상 다시 주목
업계 안팎에서는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숨통을 틀 수 있는 해법이 나오길 기대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업계 현안 관련 질문에 "다양한 투자와 일자리 기회를 가지고, 미래 세대에 도전과 혁신 의지를 불러일으켜서 더 번영하고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포괄적인 답을 내놨다. 바이든 대통령도 "한국 기업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오히려 자신의 재선을 위해 동맹인 한국에 피해를 줬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은 이에 대해 "한미 정상 간 한국 기업의 부담과 불확실성을 줄인다는 방향에 대해선 명쾌하게 합의됐다"고 말했다. 미 정상은 긴밀한 협력을 계속한다는 의지를 확인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반도체 업황의 깊은 골이 실적으로 확인된 가운데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시간은 길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한편 우리 기업은 미국 정부와 현안 해결을 위한 개별 협상에 돌입한다. 글로벌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의 TSMC가 미국 정부에 보조금을 신청하면서 독소조항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미국 정부는 업계 의견을 받아들이고 개별 기업과 협상으로 구체화한다는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