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들의 '46년 숙원'이었던 간호법 제정안이 2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마지막까지 의견 차를 좁히지 못한 여당의 보이콧에 따라, 야당(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처리된 법안은 재석 의원 181명 중 찬성 179명으로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간호계로서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과지만, 의료계의 강 대 강 대치는 더 격화될 전망이다. 대한의사협회(의협)와 대한간호조무사협회 등 13개 직역 단체가 모인 보건복지의료연대는 즉각 "깊은 유감과 분노"를 표명하며 무기한 단식 투쟁을 선언했다. 간호법의 명칭을 '간호사법'으로 바꾸는 등 처우 개선에 중점을 둔 중재안을 제시했던 당정은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염두에 두고 있다.
별도의 법안을 제정해야만 간호 환경 개선이 가능할지 의문이라며 회의적 입장을 밝혀 온 보건복지부도 당혹스러운 기색이다. 조규홍 장관은 "보건의료계가 간호법 찬반으로 크게 갈등하고 있는 상황에서 야당 주도로 간호법이 의결되어 매우 안타깝고 현장 혼란이 우려된다"고 밝혔다.
또 법안 통과 시 대규모 연대파업을 예고했던 의협 등에 대해서는 "보건의료단체가 간호법에 반대하는 이유는 충분히 알고 있지만,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는 보건의료인으로서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여 환자의 곁을 지켜 달라"고 요청했다.
반면 본회의 투표 결과를 숨죽여 지켜봤던 대한간호협회(간협)는 '역사적 사건'이라며 환호했다. 간협은 "무려 17개월 동안 혹독한 추위와 더위에도 매주 수요일마다 수백~수만 명의 간호사와 시민이 간호법 제정 촉구를 위해 국회 앞에서 그 염원을 외치고 호소하며 간절히 바라던 제정안"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17대 및 20대, 그리고 21대 국회에서 3번째로 발의된 법안으로서 2005년 입법 시도 후 무려 18년 만에 이뤄진 매우 뜻깊고 역사적인 사건"이라며 감격해했다.
간협은 간호법을 '국민의 보편적 건강보장과 사회적 돌봄을 위한 법률'로 정의하며 "우수한 간호인력 양성, 적정배치, 그리고 숙련간호인력 확보를 위한 국가의 책무를 법제화했다"고 평가했다. '간호법이 보건의료체계를 위협한다'는 의협 등의 주장과 관련해선 거듭 "일부 의료기득권 세력의 주장은 불필요한 기우일 뿐 사실이 아님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이번 간호법 제정안은 현행 의료법에서 간호사 관련 규정을 따로 떼어내 분리한 법이다. 고령화가 가속화되면서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돌봄수요가 증가하고 있고, 지금의 법 체계와 실제 간호사들의 업무내용 사이 괴리가 크다는 문제의식에 기반하고 있다.
1차 의료기관에서의 만성질환 관리는 물론 최근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는 방문간호 및 지역사회 통합돌봄 등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해당 법 1조는 "이 법은 모든 국민이 의료기관과 지역사회에서 수준 높은 간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필요한 사항을 규정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중 가장 쟁점이 됐던 개념은 '지역사회 간호'다.
간호법 제정을 격렬히 반대해온 의협은 법안이 이대로 통과될 경우, 간호사가 의사의 지도 없이 단독으로 의료행위를 하거나 개원을 할 수 있게 될 거라 주장해 왔다. 다른 직역의 업무범위를 침해해 보건의료체계가 붕괴될 거라는 반발도 여기서 나왔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가짜뉴스'라는 게 간협의 설명이다.
실제로 간호법 제10조 2항은 간호사의 업무를 현 의료법과 동일하게 '의사의 지도 하에 시행하는 진료의 보조'로 규정하고 있다. 당초 의원 발의안에서는 '환자 진료에 필요한 업무'로 보다 포괄적으로 명시됐지만, 상임위 논의 과정과 의료계 의견 수렴 등을 거쳐 이같이 수정됐다. 현재 의료법(33조)은 의사와 치과의사, 한의사, 조산사 등 구체적으로 규정된 주체에 한해 의료기관을 개설할 권리를 부여하고 있다.
간호사 출신인 국민의힘 최연숙 의원도 동료 의원들에게 법안 지지를 호소하면서 "보건의료 직역 간의 업무 침해는 간호법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부족한 의사 수와 영리 추구를 우선으로 하는 의료기관 때문"이라고 말했다. 간호사가 의료법상 의사만 할 수 있는 수술·처방 등의 행위를 하게 되면 처벌이 불가피하다는 사실도 짚었다.
최 의원은 "의사 부족으로 현장에서 의사가 해야 할 행위가 간호사에게 전가되고, 간호사의 행위는 간호조무사와 간병인에게 전가되고 있다"며 "일부 의료기관들은 인건비 절약을 위해 법에서 정한 임상병리사·방사선사 등을 고용하지 않고 간호사나 조무사에게 이 업무를 하도록 해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이 위협받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간호사의 업무범위를 명확히 하는 것이 곧 '필수의료 재건'과도 직결된다는 판단이다. 그는 "아산병원에서 근무 중 뇌출혈로 쓰러진 간호사는 의사가 없어 수술 받지 못했고, 대구에서 추락한 10대 학생도 의료기관을 찾아 헤매다 구급차 안에서 심정지로 삶을 마감했다"며 울먹이기도 했다.
간호법에는 그간 강도 높은 근무와 열악한 처우로 '번아웃'에 시달려온 간호사들의 근무환경 및 처우 개선을 위한 내용도 담겼다. 국가와 지자체가 이들의 장기근속을 유도하고 숙련인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정책을 수립하고 재정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간호사 등을 고용하는 기관과 시설장은 간호사들의 근무 환경·처우 개선을 의무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조항도 포함됐다. 병원급 의료기관은 '교육전담간호사'를 두고 직무 수행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 역량 등을 전수해야 한다. 정부는 이를 위한 운영비용을 전액 또는 일부 지원하게끔 규정했다.
다만,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가능성과 더 극심해진 의료계 내부의 반목은 간호계에도 부담이다. 총 회원이 400만에 달하는 보건복지의료연대가 총파업에 들어갈 시 '의료 대란'도 배제할 수 없다.
의협은 "결연한 의지로 정치권에 엄중히 경고한다. 간호법은 특정 직역의 이해관계만의 문제가 아닌, 국민 전체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다"며 "지금이라도 강행 처리의 과오를 인정하고 원점으로 되돌릴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즉각 강구할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필수 의협회장은 "국민 건강권을 수호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전달하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오늘부터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한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단식 돌입을 위해 전날 예정됐던 언론 인터뷰 등을 모두 취소한 것으로 파악됐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카드도 간호계가 아직 맘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간협은 대선 후보 시절 공약을 지켜 달라며 "대통령께서 현명한 판단을 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간호법 제정안보다 의료인이 모든 범죄로 금고 이상 실형을 선고받을 경우 면허를 취소하는 의료법 개정안 통과가 의협에 훨씬 부담이라는 시각도 있다. 한 정부 관계자는 "간호법이 미칠 파장보다 지금 의사들에게 뼈아픈 부분은 의료법 개정안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