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미국의 확장억제 공약을 완전히 신뢰하며 한국의 미국 핵억제에 대한 지속적 의존의 중요성, 필요성 및 이점을 인식한다. (…) 윤 대통령은 국제비확산체제의 초석인 핵확산금지조약(NPT) 상 의무에 대한 한국의 오랜 공약 및 대한민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 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력 협정 준수를 재확인하였다"
한미정상이 채택한 '워싱턴 선언'의 일부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제비확산체제의 준수를 직접 확인한 대목이다. 국내 일각에서 불거진 전술핵무기의 반입 또는 독자적 핵무장론에 공식적으로 선을 긋는 것이기도 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월 11일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조건부로 유사시 자체 핵 보유의 필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북한의 도발로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면 "대한민국에 전술 핵을 배치한다든지 자체 핵을 보유할 수도 있다"면서,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 과학기술로 빠른 시일 내 우리도 (핵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3개월 보름 뒤 열린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채택된 워싱턴 선언으로 한국의 핵무장론은 공식적으로 종료됐다.
그 대신 한미 정상은 북한의 위협에 대한 확장억제 방안을 보다 분명하게 선언했다. 북한의 위협을 관리하기 위해 핵 협의 그룹(Nuclear Consultative Group. NCG)을 신설하고, 미국 전략핵잠수함의 한국 기항 방침을 공개했다. 아울러 미국 핵 작전에 한국 재래식 지원의 공동 실행 및 기획이 가능하도록 협력하고, 한반도에서의 핵억제 적용에 관한 연합 교육 및 훈련 활동을 강화하며, 미국 전략사령부가 참석하는 새로운 도상훈련을 실시할 것 등을 명문화했다.
모두가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한 한미 확장억제의 실행력을 강화하는 조치들이다. 그렇다고 미 국방부가 지난해 10월 공개한 핵 태세 검토 보고서(NPR)의 범주를 넘어섰다고 보기도 어렵다. 나토와 달리 전술핵무기를 배치할 수 없고 비확산체제를 준수하는 상황 하에서 확장억제를 위한 최대한의 조치를 명료하게 선언한 것으로 평가된다.
왕선택 한평정책연구소 글로벌외교센터장은 "미국의 비확산 요구와 압박에 윤 대통령이 호응한 것이 이번 워싱턴 선언의 핵심"이라며, "한국의 독자적 핵무장도 불가하고 전술핵무기 재배치 옵션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확장억제를 위한 이 정도 조치 말고는 사실 더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성훈 전 통일연구원장은 "나토의 핵공유 체제에 비해 미흡하나 이번 선언으로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미국의 핵자산에 가장 근접한 국가가 됐다"고 보다 적극 평가하면서, "핵무장도 고려할수 있다는 대통령의 언급이 미국의 전향적 태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본다"고 분석했다.
미국의 정책 범주를 넘지않으면서도 확장억제 조치들을 보다 가시적으로 드러낸 워싱턴 선언에 대해 북한이 어떻게 반응할지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먼저 큰 틀에서 바뀐 게 없다는 점에서 북한이 반발은 하겠지만 위협으로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미국은 전략핵잠수함의 한국기항을 통해 '미국 전략자산의 정례적 가시성'을 증진시킬 것이라 했으나, 한국 근방에서 사거리가 너무 긴, 즉 사거리 7400km 이상의 SLBM을 장착한 전략핵잠수함에 대해 북한이 공포를 느낄지 의문"이라며, "이번 워싱턴 선언에 대해 북한이 공개적으로는 비난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북한은 군 정찰위성 발사 등 이미 예고한 도발은 이어가겠지만 핵 무력 증강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대북제재 해제 요구 등 선전전에 나설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왕선택 센터장은 "북한은 한미의 핵위협이 커진 만큼 자신들의 핵 무력 강화도 정당하며, 따라서 유엔 안보리가 대북제재를 마땅히 해제해야 한다는 논리를 강화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한미 핵 협의 그룹(NCG)의 신설로 미국 핵 자산 운용에 한국의 목소리가 반영될 통로가 마련된 만큼 북한이 강하게 반발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임을출 경남대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미국의 전략자산과 핵 자산을 분리해 볼 필요가 있다"며, "NCG 그룹의 신설로 한미가 핵 자산 운용 등에 대해 협의할 메커니즘이 마련된 만큼 북한은 정면대결의 원칙에 따라 강하게 반발할 것이고, 이미 예고한 도발은 물론 이런 국면 속에서 추가 핵실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영수 북한연구소장도 "북한은 피포위 의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확장 억제의 강화 조치에 큰 압박을 느낄 것이고 이에 대한 반발로 핵 무력 강화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영수 소장은 다만 "핵 협의 그룹의 신설과 미 핵잠수함의 한국기항 등으로 핵 자산의 가시성이 높아짐에 따라 유사시라고 해도 핵은 쓸 수 없는 무기라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고, 북한이 핵을 갖고 무엇인가 도모할 여지도 좁아지고 있다"며, "신무기를 연달아 발사하면서 핵을 최대한 활용하는 현재 국면도 이제 지나가고 있고, 그 효용도 갈수록 떨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편 북한은 27일 현재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방문과 한미정상회담, 워싱턴 선언 등에 대해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