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전세사기 피해 주택 경매 중단 지시 9일 만에 정부가 전세사기 피해 지원을 위한 특별법을 마련했다.
속도감 있는 대처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까다로운 적용요건과 더불어 야당과 피해자들이 요구하고 있는 공공매입과 관련한 내용은 전혀 담기지 않아 험로가 예상된다.
우선매수권·LH 공공임대 골자로 한 정부 주거안정 방안
국토교통부와 기획재정부, 법무부, 금융위원회, 행정안전부, 보건복지부, 국세청은 27일 합동브리핑을 통해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 방안'을 발표했다.
이번 대책은 정부여당이 예고했던 대로 특별법 제정을 통한 주거안정을 골자로 했다.
임차주택이 경매로 넘어갔을 경우 피해 임차인에게 우선매수권을 부여해 살고 있던 집을 낙찰 받음으로써 살던 집에서 내몰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우선매수권 부여에 앞서 경매나 공매가 진행 중이라면 이를 유예·정지되도록 한다.
만일 피해자가 살던 집을 매입하는 것은 싫지만 계속해서 거주하는 것은 원할 경우에는 우선매수권을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양도해 LH가 매입하도록 한 후 시세의 30~50% 수준의 임대료를 내면서 공공임대로 살 수 있게 된다.
특별법에는 경매를 가로막고 있던 임대인의 세금 미납문제 해결을 위해 조세채권 안분의 내용도 담았다.
기존에는 체납액을 모두 납세할 때까지 낙찰금액을 모두 정부가 징수해갔는데, 특별법이 통과되면 주택별로 나눠서 부담하도록 하면서 각각 경매를 진행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원희룡 국토부 장관은 "공공임대주택의 임대가격이 시세의 50% 내지 30%까지 가격 혜택이 있기 때문에 장기간 거주를 할 경우에는 실질적으로는 피해 금액이 상당히 만회되는 그러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강서구의 (한 임대인의) 경우 68억원의 국세를 체납하고 있고 물건이 110건이 넘는다. 110분의 1로 나눠서 국세채권만 가져가도록 하면 경매를 끝낼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한건설연구원 이은형 연구위원은 "당장의 주거안정 지원이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내용"이라며 "특별법과 함께 이미 제시한 전세사기 재발방지 방안을 시행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추가적인 문제를 보완수정해 나가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6가지 요건 모두 충족해야 피해자로 인정…선정과정에서의 공정성 논란 우려
피해자 주거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도 불구하고,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피해자 자격 요건에 대해서는 논란이 적지 않다.
정부가 △대항력을 갖추고 확정일자를 받은 임차인 △임차주택에 대한 경·공매 진행 △면적·보증금 등을 고려한 서민 임차주택 △수사 개시 등 전세사기 의도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할 우려 △보증금의 상당액이 미반환될 우려 등 6가지를 모두 충족해야 한다고 피해자로 인정할 수 있다고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대항력과 확정일자의 경우 일반적으로 세입자가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취하는 조치이며, 경·공매 진행은 거주권을 침해당하는 직접적인 사건인 만큼 필요조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전세사기의 의도의 경우에는 해당 사건이 전세사기 사건인지 단순한 보증금 미반환 사건인지 여부를 국토부 전세사기 피해지원위원회가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공정성 시비가 불거질 우려가 있다.
부동산시장 경색으로 주택가격이 하락해 전세보증금이 임차인에게 반환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한 경우 이런 상황을 집주인이 알면서도 무리하게 세를 놨는지, 아니면 다소 무리하게 이윤을 추구하는 바람에 사태가 악화된 것인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수의 피해자 발생 우려 요건의 경우에는 피해자가 소수일 경우에 어떻게 가이드라인을 설정해야 하는지를 과제로 남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피해자가 소수라고 해도 사건의 성격상 피해 우려가 명백하다면 이를 전세사기로 인정해야 하는데 그 판단이 사안마다 달리 내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보증금 상당액 요건의 경우 '상당액'이 어느 정도인지, 또 그 상당액의 정도를 임대인과 임차인이 모두 수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직방 함영진 빅데이터랩장은 "사기 의도와 다수 피해자, 보증금 상당액과 같은 요건에 대해서는 피해지원위원회의 해석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 있다"며 "주택경기 위축과 공급과잉 이슈로 이전 계약보다 보증금이 낮아진 역전세 사례나 임대인의 사기·기망 의도를 찾기 어려운 경우는 특별법 혜택을 받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량적인 요소이긴 하지만 임대주택의 면적과 보증금을 고려한 '서민주택' 요건도 논란의 소지가 될 수 있다.
원 장관은 "보증금 3억원, 면적으로는 85㎡ 정도면 대부분 포괄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경계선 효과 때문에 억울하게 배제되는 사람이 없도록 탄력적인 판단을 피해지원위원회 의결기구에 넘겨줄 것"이라며 가급적 널리 피해를 인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지역별로 주택 가격에 따른 임대차 시세가 천차만별이라는 점, 면적 85㎡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점 등을 근거로 한 지적이 나온다.
피해자단체·野 요구하는 선보상 후구상 내용은 제외…입장 차 여전하지만 촉박한 시간이 변수
이른바 '선(先)보상 후(後)구상'으로 불리는 공공의 주택 매입이나 전세보증금 채권 매입 방안이 이번 정부 대책에 담기지 않은 것은 예고된 수순이다.
다만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와 시민사회대책위원회,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등 피해자 단체와 시민사회계, 야당이 관련 내용의 입법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어 전세사기 피해지원 특별법 제정까지는 상당한 험로가 예상된다.
원 장관은 "어제 민주당, 정의당 정책위의장님들을 만나 뵀고 그 주장의 내용을 상세히 들여다봤다"며 "너무나 다른 내용이고, 또 토론에 들어갔을 때는 결론을 내리기 힘든 점이 있기 때문에, 현재 그것을 실행 가능한 방안으로 만들어내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에서 암묵적인 공감대가 있었다"고 말했다.
선보상 후구상 내용을 담고 있는 민주당 조오섭 의원 대표발의안과 정의당 심상정 의원 대표발의안이 발의가 돼있기는 하지만 민주당도, 정의당도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사실상 인정했다는 의미다.
반면 두 야당은 원 장관의 해석과 전혀 다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지난 26일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특별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한 조 의원은 정부여당의 특별법안 내용에 대해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이 사태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등 전문채권기관이 반환채권을 매입하는 특별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심 의원도 "정부 대책으로는 깡통전세의 전방위 확산을 고려하면 다양한 피해사례의 10분의 1도 포괄하지 못한다"며 "정부가 피해자와 야당의 제안을 정쟁적으로만 대하지 말고 다양한 방안을 수용해 최대공약수로 하는 민생협치를 해줄 것을 호소한다"고 말했다.
상당수 피해자들의 목소리도 야당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빌라왕 피해자 대표 배소연씨는 "포장지만 번드르르한 알맹이 없는 대책이 아닌, 피해자들이 꼭 활용할 수 있는 조세채권 안분과 보증금채권 매입 같은 대책을 우리가 활용할 수 있게 법안을 통과시켜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안상미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대책위원장도 "사기는 구제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그 사기를 누가 주도했나. 정부 제도가 주도했는데 왜 우리를 세금도둑으로 만드느냐"며 "선구제 방법을 찾아 달라. 50%라도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찾아서 얘기를 해 준 후에 왜 안 되는지를 설득시켜 달라"고 호소했다.
이같은 입장 차에도 불구하고 여야와 피해자들 모두 특별법을 하루 빨리 제정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는 만큼 논의 과정에서 극적으로 합의안을 도출할 가능성도 있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는 28일 여야가 발의한 3개 특별법안을 상정한 후, 주말 직후인 5월 1일 국토소위원회, 5월 2일 국토위 전체회의를 통해 본격 논의에 나설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