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피해자를 양산한 조직적인 전세사기 사건에 다수의 공인중개사가 가담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공인중개사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지고 업계에 대한 공분이 커지고 있다.
현장에서는 '악성 공인중개사'에 대한 정보가 공유되지 못해 전세사기 연루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거나 재판에 넘겨진 공인중개사가 버젓이 중개를 계속하는 경우가 있다며 추가 피해 방지를 위해 관련 정보가 공유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확정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무죄추정의 원칙 등으로 관련 정보가 공개되는데 한계가 있는 상황이다.
이에 현장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지역 공인중개사들이 이상 징후를 포착했을 때 이를 신고하도록 하고, 이런 신고가 신속한 수사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울러 공인중개사들의 책임과 의무도 강화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전세사기 가담' 나쁜 공인중개사 넘쳐 나는데 관련 정보는 無
26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경찰청이 지난해 7월부터 올해 3월 말까지 전세사기 전국 특별 단속을 벌인 결과, 전세사기로 입건 된 피의자 2188명 중 414명(18.9%)은 공인중개사였다. '가짜 임대인' 1천명(45.7%) 다음을 많은 숫자다.
시세를 알기 어려운 신축 빌라의 가격을 부풀려 전세 계약을 유도하는 식이다. 계약 만기 때 전세보증금을 제때 돌려받지 못하는 이른바 '깡통전세' 위험이 크다는 점을 알면서도 성과 보수 등을 노리고 범행에 가담하는 것이다. 대규모 피해자를 양산한 인천 미추홀구 '건축왕' 사건만 봐도 공인중개사법 위반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공인중개사가 6명이다.
문제는 세입자들이 이런 악성 공인중개사를 걸러낼 수 있는 정보가 전혀없다는 점이다. 전세사기 가담혐의로 기소돼 재판에 넘겨지더라도 최소한 확정판결 전까지는 이런 사실이 알려지는데 한계가 있어 이 기간동안 문제의 공인중개사가 중개업무를 하는데 사실상 아무런 제약이 없다.
한 업계 관계자는 "화곡동 '빌라왕'이나 미추홀구 '건축왕', 동탄 등지에서는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던 지역 공인중개사들이 꽤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지금도 전세사기 연루가 의심되거나 수사를 받고 있거나, 심지어 재판이 진행 중임에도 버젓이 중개 업무를 계속 하고 있는 중개사들이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당국도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지난 25일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위치한 전세피해지원센터에서 국토교통부 원희룡 장관은 "(전세사기에 가담한) 공인중개사들이 사기에 가담한 것을 입증하는건 상당히 까다로운 문제겠지만 (확정판결까지 난 뒤) '악덕 공인중개사'라는 딱지를 붙이려면 어느 세월에 되겠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도 "수사 개시나 기소 단계에서 '이 공인중개사는 10건, 30건 이상 문제가 있는 중개가 있습니다'라고 공개한다면 불법의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공인중개사협회의 자율적인 자정 노력이 있다면 (이에 따른 빈틈을) 커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민간과 공인중개사협회, 정부, 지자체가 연결, 보완된 체계를 갖고 잠재적 피해자들에게 위험을 알려주는 것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영우 토지정책관도 "국토부 차원에서 전세사기 가담자들에 대한 수사 요청을 계속하고 있지만 수사와 기소, 판결까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수사를 요청한 공인중개사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고 공유하는 것은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면서도 "그런 것(확정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일정 부분을 어떻게 공유할 것 인가는 관련 통계 시스템을 구축하면 효과가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악성 임대인 명단은 제한적이지만 조만간 공개될 방침이다. 지난 2월 악성 임대인 명단을 공개할 수 있는 내용의 주택도시기금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오는 9월부터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안심전세'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악성 임대인 명단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악성 임대인은 전세보증금을 반환하지 않아 HUG가 이를 대신 변제했고, 보증금 미반환으로 강제 집행 및 보전 조치 등을 2회 이상 받은 임대인만 공개되는 만큼 신상 공개 대상 기준이 까다롭다는 지적도 있다.
관련 제도 보완, 공인중개사 권한·책임 강화에 집중
악성 공인중개사 정보 공유에 대한 한계 때문에 정치권은 공인중개사의 권한과 책임을 강화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정부는 오는 6월 공인중개사가 신용정보시스템 등을 통해 임대인의 세금 체납 정보나 주택의 선순위 권리 관계를 열람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공인중개사법 개정안을 발의할 예정이다. 아울러 공인중개사가 집행유예 등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을 경우 중개사 자격을 취소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업계에서도 자체적인 근절 대책을 마련해 시행하고 있다. 한국공인중개사협회는 5년 전 전국 256개 시군구에 지회와 지회별 지도단속위원회를 설치했고, 신용정보평가회사와 MOU를 맺고 임대인의 소유 주택 수와 대출 규모, 대출 및 세금 체납 여부 및 규모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지난 3월부터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공협 관계자는 "협회에서는 공인중개사가 임차인에게 임대인 동의 하에 그의 신용정보 확인이 가능하다는 점을 알려주고, 상호 합의 하에 임대인 신용정보 확인 후 계약에 나서면 전세사기 발생 가능성은 현저히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면서도 "협회가 법정 단체도 아니고 회원인 공인중개사들에게 계약 전 임대인 신용정보 조회가능 사실 고지 등을 강제할 권한도 없다 보니 답답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문제 공인중개사들에 대한 정보는 지역에서 조금씩 포착되고 있지만 협회는 공인중개사 조사 권한도 지도 관리 기능도 없어 관련 내용을 취합해서 수사 기관에 전달하는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중개인에게 최대한 많은 정보 주고 세입자에게도 전달되도록 해야"
전문가들은 선량한 공인중개사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권한과 책임을 강화하면 전세 사기 피해를 상당 부분 예방할 수 있다고 제언한다.
한국자산관리연구원 고종완 원장은 "한 지역에서 10~20년 중개 업무를 이어온 공인중개사는 그 지역의 부동산 거래 동향과 흐름, 전망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고 이들을 잘 활용하는 것이 많은 예산을 사용하지 않는 실효적인 전세사기 예방 대책"이라며 "공인중개사들에게 임대인 개인에 대한 신용정보는 물론 해당 지역의 전세사기의심사례, 악성임대인 등 가급적 많은 정보를 제공해 이들이 1차적으로 문제 있는 임대인을 걸러낼 수 있게 하고, 중개인의 확인 설명 의무를 강화해 문제가 될 수 있는 사항을 세입자에게 고지하도록 관련 제도를 보완하면 전세사기 문제가 발생할 확률은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업계도 책임 강화에 찬성하고 있다. 한공협 관계자는 "전세사기가 확산되면서 전체 공인중개사들이 '잠재적 사기꾼'으로 내몰리고 있는데 중개업은 신뢰도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업종이기 때문에 많은 선량한 공인중개사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공인중개사들의 권한이 늘어나면 당연히 의무도 늘어나는 것이고, 권한 강화가 여의치 않아 의무만 더해지는 방향이더라도 하루빨리 관련 제도가 정비돼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고 업계가 정상화되길 바라는 것이 다수 공인중개사들의 목소리"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