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19일 보도된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라든지, 국제사회에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대량학살이라든지, 전쟁법을 중대하게 위반하는 사안이 발생할 때는 인도 지원이나 재정 지원에 머물러 이것만을 고집하기 어려울 수 있다"며 무기 지원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처음 시사했다.
우리 정부는 러시아와의 외교나 경제 관계를 고려해 우크라이나에 대해 살상 무기만은 지원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지켜 왔는데, 이 방침이 변화할 움직임을 보인 셈이다. 최근 드러난 155mm 포탄 대미 판매나 대여와는 별개로, 특히 북한을 두고 또다른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일은 우려도 나온다.
'조건' 달긴 했는데 러시아 전쟁범죄는 이미 개전 초부터…곧 본격 지원 나서나?
윤 대통령은 19일 공개된 인터뷰에서 "불법적인 침략을 받은 나라에 대해서 그것을 지켜주고 원상회복을 시켜주기 위한 다양한 지원에 대한 제한이 국제법적으로나 국내법적으로 있기는 어렵다"면서도 "전쟁 당사국과 우리나라와의 다양한 관계, 그리고 전황 등을 고려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뿐이다"고 말했다.
말뜻을 그대로 풀이하면 피침략국인 우크라이나에 보다 적극적인 지원을 하고 싶지만 침략국인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를 고려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윤 대통령은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공격',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대량학살', '전쟁법을 중대하게 위반하는 사안'이라는 조건을 달아 살상무기 지원 가능성을 이번에 처음으로 언급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이미 모두 일어난 일이다. 개전 초 우크라이나 키이우 주의 소도시 부차에서 벌어진, 1천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부차 학살이 대표적인 예다. 그 외에도 러시아군은 민간인 지역에 대한 미사일 공격, 포로 살해 등 각종 전쟁범죄를 계속 저지르고 있다.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전쟁범죄 혐의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한 상태다.
달리 말하면,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 다시 말해 명분은 이미 갖춰졌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19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상황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다. 답변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면서도 "정부 입장이 변경된 것은 아니다"고 확대해석을 경계하긴 했다.
그러잖아도 우리나라는 최근 155mm 포탄을 미국에 대여하는 내용의 계약에 합의하기도 했다. 대여되는 포탄은 한국 업체(풍산)가 새로 생산한 물량이 일부 포함될 수 있지만, 한국군이 보유한 포탄 중 일부를 대여하는 방식으로 계약이 이행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해졌다. 미군이 한반도에 전시 대비용으로 쌓아놨다가 한국이 인수한 전쟁예비물자(WRSA)일 가능성이 높다.
최근 온라인에 유포된 미국 정부 기밀로 보이는 문건에는 '대한민국 155 운송 일정표(33만)'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만약 미국이 이 정도 숫자를 필요로 한다면 대략적인 물량도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포탄 재고 부족을 메우기 위해 지난해에도 한국산 포탄을 수입한 것으로 파악됐다. 국회 국방위 국민의힘 간사 신원식 의원은 12일 아침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지난해 풍산에서 미국만 사용하는 조건으로 10만 발을 수출했다"고 말했다.
마침 한국은 전시 대비물자로 155mm 포탄 가운데 미군의 M107과 이를 한국에서 생산한 KM107 포탄을 잔뜩 쌓아두고 있는데 사실 이것 말고도 더 있다. 우리가 자체개발해 사거리를 40km까지 늘린 항력감소 고폭탄이 그것인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표준에 가까운 것은 전자이므로 지원 가능성이 높은 것도 전자다. 대비태세에 지장이 생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약간은 덜 수 있는 셈이다.
'북러 협력 재개' 위협한 푸틴…대러관계는 물론 '대북' 외교공조에도 영향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대러 외교에 지장이 생기는 일은 피해갈 수 없다. 같은 '무기'라고 해도 '공여'와 '지원'은 천지 차이다. 북한을 견제하기가 더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 러시아와의 교역 규모가 최소 수조원 규모에 이른다는 점도 문제다.
우리 정부가 포탄 제공에 '대여' 방식을 택한 것은 미국을 거쳐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우회 지원하는 형태로 비쳐, 외교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을 낮추기 위함으로 풀이됐었다. 방위사업관리규정에 의해 최종 사용자를 정한다고 해도 포탄 한 발 한 발의 이동을 감시할 수 없는 만큼, 우크라이나로 들어간다면 이를 막을 방법은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대책이 없는 것 자체는 대여도 비슷하지만 '빌려주는' 방식인 만큼 나중에 문제가 된다면 최소한 회수를 요구할 수는 있다.
그러잖아도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탄약을 제공하기로 결정한 것을 알고 있다"면서 "러시아가 북한과 협력을 재개한다면 한국은 어떤 반응을 보일 건가"라고 위협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북한의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를 제재했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중국과 러시아의 연이은 거부권 행사로 제재는 둘째치고 의장성명조차 채택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동생 김여정 부부장도 올해 1월 담화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미국을 비난하며 "로씨야(러시아)의 안전(보장)우려를 전면 무시하고 우크라이나에 천문학적 액수의 군사장비들을 넘겨주면서 세계의 평화와 지역의 안전을 파괴하고 있는 미국과 서방나라들은 주권국가들의 자위권에 대하여 시비할 자격이나 그 어떤 명분도 없다", "우리는 국가의 존엄과 명예, 나라의 자주권과 안전을 수호하기 위한 싸움에 나선 로씨야 군대와 인민과 언제나 한 전호(참호)에 서 있을 것이다"고 공개 지지선언을 했다.
북한이 핵·미사일과 우주 개발을 할 때 자주 내미는 논리 가운데 하나가 '자위권' 이다. 북한은 이른바 '대북 적대시 정책'을 군사적 문제뿐만 아니라 인권, 경제(대북제재) 문제 등 매우 포괄적인 개념으로 인식하는데, 이를 피포위 의식(siege mentality)이라고 한다. 미국으로부터 핵 위협을 받고 있으니 핵무기를 개발해 '국가의 안전'과 함께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지켜야 한다는 식의 논리다. 무기 지원은 이러한 논리에 명분을 더해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이화여대 북한학과 박원곤 교수는 "우리가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을 한다고 해도 이는 국제법에 따른 정당한 방법이 될 것이며, 그 반작용으로 러시아가 북한에 지원을 한다면 도리어 유엔 안보리 제재를 위반할 가능성이 높다"며 "중국과 러시아가 제재의 '뒷문'을 북한에 열어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노골적이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그는 "안보리 제재 자체가 중국·러시아도 동의해서 통과됐기 때문에 추가 제재는 반대하더라도 기존의 제재를 없앨 수는 없다"면서 "윤석열 정부가 무기 지원을 얼마나, 어떤 방법으로 하느냐에 달려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그럼에도 러시아가 북한에 대규모 군사 지원을 한다든지 하는 일은 어렵기도 하고, 러시아가 첨단 기술을 잘 넘기지도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이러한 우려를 의식하기는 한 듯, 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는 윤 대통령의 인터뷰가 보도된 19일 자신의 트위터에 "이것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방 지원 가능성에 대한 한국 지도자의 첫 공개 성명"이라고만 짧게 언급했다.
한편 원래대로라면 모스크바 현지에서 복잡한 외교 문제를 진두지휘해야 할 장호진 주러시아 대사는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 사퇴에서 시작된 회전문 인사의 여파로, 얼마 전 외교부 1차관에 임명돼 서울로 돌아온 상황이다. 물론 1차관은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들 사이의 직접적인 외교를 총괄하는 만큼 러시아 관련 업무도 당연히 그의 소관사항이다.
새로운 대사가 임명되지 않은 만큼 이동렬 공사가 현재 대사 업무를 대행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문재인 정부 시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에서 평화외교기획단장을 맡았던 적이 있으며, 외교가에서 이른바 '러시아통'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