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전세피해 관련 주택 경매 중단하라는 대통령 지시가 있었다는데 여기서는 전혀 체감 못해요. 인천시 대책도 잘 모르겠어요. 우리하고 만나고 난 뒤 대책 내주면 안되나요?"
안상미 전세사기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은 19일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전세사기 피해 관련 주택 경매 중지 지시에도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앞서 윤 대통령은 전날 원희룡 국토교통부장관에게 경매일정 중단 및 유예책 시행을 지시한 바 있다. 그러나 이날 오전에도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경매장을 향했다. 안 위원장은 "대통령 지시에도 여전히 경매가 진행되고 있고 전혀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실제 대책위 가입 1787세대(4월11일 기준) 중 캠코 관리 주택은 128세대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은행권 관리 주택이다.
인천시 피해자 지원 대책 발표…피해자들 "만나서 얘기하고 대책 내달라"
인천시도 이날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대책을 발표했지만 안 위원장은 "제발 피해자들을 만나고 대책을 내달라"며 "언제까지 피해를 상상하고 대책을 내놓을 거냐"고 반박했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이날 언론 브리핑을 열고 전세사기 피해자 추가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인천시는 우선 전세 사기 피해자에게 보증금 대출 이자를 지원할 계획이다. 전세 피해 확인서를 발급받고 관련 소득 기준(연 소득 7천만원 이하)을 충족한 피해자에게는 버팀목 전세자금 대출 이자 금리 1.2~2.1%를 2년간 전액 지원한다.
전세 사기 피해자 가운데 만 18~39세 청년을 대상으로는 12개월간 월 40만원의 월세를 지원할 예정이다. 또 긴급 주거지원을 신청해 공공주택에 입주하는 세대에는 가구당 150만원의 이사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인천에는 긴급 주거 임대주택 238호가 확보됐으며, 이 중 11호만 입주가 완료됐다. 다른 27호는 입주 대기 중인 상태다. 시는 다만 대출 이자와 이사비를 지원하는 방안은 보건복지부와 사회보장제도 신설 협의를 거친 뒤 예산을 확보해 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시기적으로 다음 달 말쯤 시행될 전망이다.
아울러 시는 전세 사기 피해자 가운데 인천에 사업장을 둔 소상공인에게는 업체당 3천만원 이내 범위에서 융자를 지원한다. 상수도 요금을 제대로 내지 못한 피해자에게는 단수 예고를 즉시 유예하도록 조치했다. 한전에도 단전 조치 유예를 요청했다.
이와 함께 인천 전세피해지원센터에는 경매·공매 전문법률상담사를 추가로 배치해 법률지원을 확대하고, 피해자를 위한 자살 예방 심리지원 프로그램도 추가로 운영할 예정이다.
인시는 인천에 이른바 '건축왕', '빌라왕', '청년 빌라왕'이 소유하던 주택이 3008호가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들 주택 대다수는 전세 사기에 연루된 것으로 추정됐다.
인천시 관계자는 "피해자들은 경매·공매 중지와 최우선변제금 적용 시점 변경 등을 요구하고 있으나 법령 제정·개정이 필요해 시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하기에는 제도적으로 한계가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갚기 어려운 전세 대출금…개인회생 등 면책 가능성도 검토"
인천시는 대책과 별도로 정부에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방안으로 개인회생 지원을 검토하고 있다.
최태안 인천시 도시계획국장은 "피해자들이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건 보증금을 되돌려 받는 것이지만 민사소송 등 여러 어려움이 있다"며 "전세금을 되돌려받지 못해 대출금도 상환하기 어렵다면 경제활동을 하면서 개인회생할 수 있는지 관련 기관에 검토를 요청했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해 서울회생법원이 주식투자와 가상투자 손실금에 대해 면책하겠다고 발표한 것에 착안한 것이다. 주식이나 가상화폐 등 개인 판단에 따른 투자 실패에 대해 면책 적용 범위를 넓혀준다면 임대인의 사기행각으로 손실이 발생한 경우라면 정부에서 최대한 그 책임을 면책해줄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피해자들이 민사소송 등을 통해 보증금을 되돌려 받은 뒤 대출금을 돌려주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면 전세 대출금의 채무를 채무액의 20%가량만 내면 탕감하는 방식으로 법적 구제절차를 마련한다면 대안으로 가능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지금까지 숨진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최우선변제금 적용 대상이 아니거나, 대상이 되더라도 일부만 돌려받게 되는 상황이었다. 정부는 전세사기 피해가 잇따르자 최우선변제금 적용 금액을 상향했지만, 제도 시행 전 임대인 요구에 따라 이미 큰 폭으로 전세금을 올려 계약한 피해자들은 이마저도 적용받지 못했다.
지난 17일 숨진 피해자 A(31·여)씨가 살던 아파트는 통째로 지난해 임의 경매(담보권 실행 경매)에 넘어갔다. A씨는 2019년 보증금 7200만원에 전세 계약을 맺었으나 2021년 9월 임대인의 요구로 재계약을 하면서 보증금을 9천만원으로 올렸다. 2019년 최초 계약 당시 A씨는 소액임차인 조건인 전세보증금 8천만원 이하였기 때문에 경매로 집이 넘어가더라도 최우선변제금 2700만원은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2021년 재계약 시점에서는 주택 임대차 보호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다.
지난 14일 숨진 피해자 B(26)씨가 살던 아파트도 2021년 8월 재계약을 하면서 6800만원이던 전세금을 9천만원으로 올려준 상태였다. 이에 주택이 낙찰되더라도 최우선변제금 3400만원 외 나머지 5600만원은 받을 수 없었다.
앞서 지난 2월 28일 미추홀구 빌라에서도 보증금 7천만원을 받지 못한 C(39)씨가 사망했다. 그가 살던 빌라의 소액임차인 전세금 기준액은 6500만원이었다. C씨는 겨우 500만원 차이로 최우선변제금을 보장받지 못했다.
대책위는 피해 확산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정부의 경매중지 결정에 이어 △범정부 TF결성 △긴급주거 거주기간 장기화 △피해 보증금 선반환 △중복대출 혜택 제공 등 10대 요구안을 주장하고 있다. 안상미 위원장은 "인천시의 취지는 알겠지만 어떤 대책이든 제발 말 말고 실현 가능한 걸 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경찰은 인천 미추홀구에서 대규모 전세사기 범행을 한 60대 건축업자 일명 건축왕의 여죄를 수사 중이다. 건축왕은 161세대를 상대로 125억원에 달하는 금액을 챙긴 혐의로 기소됐으나, 피해세대는 800여 세대, 피해금액은 500억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건 이후 인천에서는 지난 2월부터 3명이 잇따라 극단적 선택을 했다. 대책위는 전국단위로 규모를 넓혀 위원회를 발족하고 전날 오후 3명에 대한 추모제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