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그런 연기들이 가능했는지' 묻자 '오히려 연기라 가능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직장인이었던 그는 어떤 배우보다도 '직업인'의 정신이 확고했다. '오징어 게임'의 글로벌 성공으로 이제 허성태의 얼굴을 모르기가 더 어렵지만 딱히 그런 현상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라면 무엇이든 거리낌 없이 해나갈 수 있다는 각오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허성태에게는 큰 욕심이 없다. 언젠가 아내와 함께 전원생활을 약속하고, 어머니가 자신이 나온 OTT 작품들을 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일상이 가장 소중한 순간들이다. '미끼'는 첫 주연작이지만 꾸준히 찾는 배우가 된 것 만으로도 기적과 다름없다고. 안정적인 직장을 포기하고 뒤늦게 선택한 길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놀랍게도 카메라 앞에서 허성태는 달라진다. 한 마디로 모험과 도전을 즐긴다. '미끼' 역시 희대의 사기꾼 노상천의 인생 전체를 그려보고 싶단 마음에 참여하게 됐다. 현장이 가장 행복하기에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장면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변주한다. 믿고 맡기는 애드리브가 가능한 이유도 그래서다. 연기를 잘하기보다 연기로 행복하기가 더 쉽지 않다. 허성태는 그 힘든 것을 해냈다는 점에서 이미 완성 단계인지도 모른다. 다음은 배우 허성태와의 일문일답.
A 제 인생에서 부담감을 제일 세게 느끼고 있는 거 같다. 파트1보다 훨씬 그렇고, 난생 처음 주연배우의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 첫 주연까지 10~11년이 걸렸는데 상대적인 기간이 너무 짧고, 운이 좋았던 거 같다.
Q 희대의 사기꾼 노상천 역을 연기하면서 어떤 부분에서 신경 썼는지. 조희팔 사건이 모티브라고 들었다
A 노상천 역은 한 인물의 긴 시간을 연기해야 하고 그러면 분명히 시기에 따른 변화가 필요하다. 배우로서 그런 기회가 많지 않아서 매력적이었고, 욕심이자 도전의 문제였다. 조희팔의 일부가 포함된 캐릭터인데 영화 '꾼'에서 제가 그런 캐릭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부분을 많이 찾아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보기 불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이 상황에서 허성태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했다. 초반에 그런 부분이 많이 녹아 있는 거 같다. 이후 성공했을 때는 세련되면서 남들에게 좋은 이미지, 화술도 능수능란하게 보이도록 조미료를 첨가했다. 변주에 신경을 많이 썼다.
Q 서로 쫓고 쫓기는 사이, 형사 구도한 역의 배우 장근석과 호흡은 어땠나
A 데뷔를 따지면 개념적으로는 대선배님이다. 그런데 장근석 배우가 먼저 적극 다가와서 고마웠다. 서로 편하게 같이, 재미있게 할 수 있었다. 저도 연장자이지만 별로 호칭에 개의치 않아서 편하게 마음대로 하라고 했고 그래서 형이라고 하는 거 같다.
A 제 애드리브와 아이디어가 제일 많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그만큼 많이 열어주고 받아주셨다. 계속 웃으면서 찍으셨다.(웃음) 대사나 지문도 굉장히 많이 바꿨고, 연결성을 위해 수염을 깎자는 아이디어도 제가 냈다. 성공한 노상천의 등장 장면에서 제스처나 단어 선택이 다를 거 같아서 '노상천 인사드립니다'란 대사를 즉석에서 영어로 '마이 네임 이즈 노상천'(My name is '노상천'·내 이름은 노상천입니다)으로 바꿨다. 원래 애드리브 준비는 많이 하는데 감독님마다 색깔이 다르니까 매번 녹이거나 제시하기 어렵다. (김홍선 PD 전작인) '종이의 집'은 또 그렇지 않았다고 듣긴 했지만 이번엔 즐겁고 자유롭게 했다. 아마 장근석 배우의 진중한 장면과 제 장면 사이 톤을 잡는 게 감독님의 고민이었을 거 같다.
Q '오징어 게임' 이후 화제의 OTT 작품에는 빠지지 않는 것 같다
A 다행히 운이 좋고, 업계 분들이 저를 나름대로 잘 활용하시는 거 같다. OTT를 하기 위해 작품을 선택한 건 없다. 아무래도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이란 작품의 덕수로 저라는 사람이 글로벌하게 알려진 배우라 선택하시는 이유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덕수는 너무 고마운 캐릭터다. 저를 세상에 알려준 부분이 아니라 배우로서 폭넓게 역할을 시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Q 지금의 허성태가 있기까지 가장 중요한 전환점을 꼽아본다면
A 김지운 감독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지금 이 모든 게 없다. 은인이다. 감독님이 영화 '남한산성' 시사회에 오셨고 당시 촬영감독님이 '저 배우 연기 좀 보시라'고 해서 '밀정'의 공개 오디션을 볼 수 있었다. 거기서 당당하게 조연으로 합격을 했는데 당시 몇몇 회사에서 제 연령대 배우를 넣으려고 했었다. 돈을 안 받고 역할을 하겠다고도 했다. 그런데 감독님이 끝까지 성태랑 하겠다고 지켜줬다. 결국 '남한산성'이 없으면 '밀정'도 없고, '밀정'이 없으면 '오징어 게임'도 없는 거다. 일반인일 때도 김지운 감독님 영화를 수십번 볼 정도로 팬이었다. 뭔가 운명적 만남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신인 때 작업한 분이라 카리스마가 무서워서 개인 문자는 못 드리고 종종 SNS 메시지를 보낸다.(웃음)
A 이전까지는 '밀정'의 하일수. 그런데 노상천이 붙으면 노상천일 거 같다. 역대 최고 '나쁜 놈'이다. 불특정다수가 그 일 때문에 운명을 달리하기도 하고, 사회적 파장이 크지 않나.
Q 이런 역할 제안이 유독 많이 들어오는 이유가 뭘까. 실제 성격은 굉장히 내향적인 거 같은데. 다른 역할에 대한 갈증은 없는지
A 강하고 진하게 표현이 필요할 때 그럴 수 있는 배우라 그렇지 않을까. 특히 장르물에 많이 나오기도 했지만 센 배우를 생각하신 거 같다. 컷하면 사실 되게 괴롭다. 무게 잡고 멋있는 척, 싸움 잘하는 척 할 때 오그라든다. 내가 아닌 거 같고 숨고 싶은데 일은 일이니까.(웃음) 갈증은 없었다. 지금 잘된 배우들도 다 악역을 많이 했고, 또 엄마는 재미있는 역할이니까 하라면서 좋아하신다. 악역 아닌 역할도 있었는데 작품이 많이 잘되지 않아서 인식되지 않는 것 같다. 실제 저와 다른 모습을 보고 써주시는 감독님들이 계시다는 확신이 들어서 그런 고민은 없다.
Q 어떻게 보면 직장인의 꿈 같은 존재다. 현실에 순응해 살아갈 수도 있는데 회사원으로 살다가 배우로 성공적 전향을 했다. 이 시대의 직장인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A 너무 다행이고 행복하다. 엄마와 항상 이 이야기를 한다. 무모하게 도전했는데 지금 이 상태면 천만 다행이라고. 만약에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자체가 고통스럽고 괴롭다면 후회했겠지만 저는 그 순간만큼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이 없다. 카메라 돌아갈 때가 제일 행복하다. ('직장을 떠나 꿈을 좇으라'고) 함부로 이야기하기 어렵다. 저도 직장인이었고 그 어려움을 알기 때문에…. 사실 다른 꿈이 있다면 현재 그 욕구를 억누르고 희생하는 거다. 그렇기에 직장인 분들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Q 배우이자 인간 허성태의 지향점이 있다면
A 배우 생활은 열심히 하고, 다만 지금은 서울에 살고 있는데 나중에 경기도 인근에서 조용한 전원 생활을 하고 싶다. 아내와도 다 합의가 된 바다. '나는 자연인이다' 애청자이기도 하고, (그런 생활이) 완전 로망이다. 사람 냄새 나는 배우, 사람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 연기는 연기고, 인터뷰나 예능에서 가식을 떨 수 있는 스타일도 아니다. '저런 사람이구나' 그냥 그렇게 봐주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