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 일가를 지키는 게 그룹을 지키는 거고, 계열사에 매달려 있는 수천명 직원들 밥줄 지키는 거야!"
"회장님이 아끼는 모든 것들을 회장님 눈 앞에서 가루가 되도록 깨부술 겁니다!"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고 싶었으니까 진심이기도 하지. 내 손에 묻은 피를 깨끗하고 소독하고 싶은…."
"다신 일어서지 못하게 숨통까지 끊어 버리자고!"
"연어는 아주 못된 습성이 있지. 그저 강물이 흘러가는 대로 내려가서 적당한 자리에 알도 낳고 분수에 맞게 한철 보내면 되는데, 굳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알을 낳고 죽지 않니?"
어둡고 공기 탁한 공간을 울리는, 검정 슈트를 잘 차려입고 머리카락을 공들여 빗어 넘긴 중년 남성 배우들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연상되기 십상이리라.
이를 한번 뒤집어 보는 건 어떨까. 그 자리에 여성 배우들을 배치해 보자는 이야기다. 근엄한 표정과 단호한 목소리 그리고 권위 가득한 몸짓. 그간 남성 배우들 전유물처럼 여겨져 온 바로 그것으로 여성 배우들이 '정치공학적' 대사를 일갈하는 것이다.
카랑카랑한 여성 배우들 목소리로 위 대사들이 실현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충분히 특별한 체험이다. 이른바 전복의 카타르시스. 넷플릭스 드라마 '퀸메이커'는 그러한 이야기다.
이 드라마는 대기업 전략기획실을 쥐락펴락하던 이미지메이킹 귀재 황도희(김희애)가 잡초처럼 살아 온 인권 변호사 오경숙(문소리)을 서울시장으로 만들고자 선거판에 뛰어들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다.
극중 여성들은 계급상승을 향해 들끓는 욕망을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그것에 충실하다. 욕망의 목표물이 돈이냐, 권력이냐, 정의 실현이냐에 다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정치판 부조리를 나타내는 '정경언 유착' '금권정치'로 사회를 뒤흔드는 세력 역시 여성이다. 이에 맞서 깨끗한 정치, 정의로운 사회를 외치는 일 또한 여성들 몫이다.
이 드라마에서 그리는 모든 권력의 중심에는 남성 아닌 여성이 있다. 그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여성, 남성의 역할은 보기 좋게 전복된다. '퀸메이커'가 지난 1977년 발표된 노르웨이 작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을 변주한 곡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여성과 남성의 성역할이 뒤바뀐 가상의 나라 '이갈리아', 그 배경이 반세기 가까운 시간을 뛰어넘어 '코리아'로 옮겨온 셈이다. 전복의 미학은 현실 세계의 부조리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거울인 법이다.
'퀸메이커' 이야기 줄기는 다분히 도식적이다. 캐릭터 당위성을 강화하고자 과장된 에피소드가 줄을 잇는다. 그렇게 주인공들은 우여곡절 끝에 공공의 적에 맞서기 위해 예정된 수순대로 손잡는다. 목표로 향하는 과정 과정은 마치 주어진 단계별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게임 같다. 소수가 만족할 현실감보다는 다수를 염두에 둔 극적 긴장감에 무게를 둔 까닭이리라.
배우들 연기는 이러한 흠결을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주축을 이루는 여성 배우들은 마치 족쇄를 벗어던진 호랑이처럼 포효한다. 전형적인 남성 서사 위에 여성 배우들이 포진한 것은 그 자체로 묘수다. 특히 김희애와 문소리의 첫 대면 장면에서는 말 그대로 불꽃이 튄다. 웃음과 긴장이 공존하는 이 특별한 만남에는 말 그대로 압권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