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세월호를 타고 제주도로 향한 단원고 아이들은 결국 수학여행지인 제주도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극 '장기자랑' 속 아이들은 제주도에 도착해 열심히 준비했던 장기자랑을 선보인다. 과거의 기억 속 아이들은 제주도에 가지 못했지만, 이제 새로운 기억 속 아이들은 제주도에서 환하게 웃는다.
극단 '노란리본'의 배우들이자 세월호 엄마들은 지난 9년간 '아픔'과 '슬픔' '고통' 등으로 기억됐다. 아이들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가 세월호를, 아이들을, 엄마들을 아프게만 기억하고 있을 때 그들 역시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알게 모르게 그들에게 '피해자다움' '유가족다움'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연극 무대는 그런 엄마들에게 '유가족다움'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왔다. 그들에게도 노여움과 슬픔뿐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도 존재하는 인간임을,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행복해했는지 알려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아이들을 기억하고, 기억하도록 할 새로운 방법이었다. 세월호 엄마들이자 '노란리본' 배우들은 말한다. 이제, 새롭게 기억하자고.
고마운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변화시켜 나간 세월호 엄마들
▷ 처음 연극 무대에 서서 관객들과 호흡했던 순간을 기억하나?
영만 엄마 이미경(이하 영만 엄마) : 첫 무대는 18분이 좀 안 되는 쇼케이스였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무대 섰던 거 같다. '그와 그녀의 옷장'이라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그린 연극으로, 단원구 노인복지관에 올리게 됐다. 처음이다 보니 무대가 익숙지 않아서 등·퇴장도 몰랐다. 내가 언제 나가는지 몰라서 무대 공연하고 있는데 천막 뒤에서 내다보고.
예진 엄마 박유신(이하 예진 엄마) : 관객들이 다 보고 있는 줄 몰랐다. 그런 다음에 감독님이 이분들이 할 수 있겠나 싶었을 텐데, 완공을 올리게 됐다. 이러다 대학로까지 갈 수 있겠냐고 했는데 갔다.
영만 엄마 : 감독님이 "대학로 진출합니다"라고 해서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말 공연을 잡게 됐다. 그때가 박근혜 퇴진 운동을 할 때여서 우리를 응원하던 사람들이 못 왔다. 그런데도 공연이 매진됐다. 우리 알리게 된 첫 번째 공연이었다. 그 뒤로 노란리본 극단을 향한 응원이 어마어마했다. 그해 우리가 카레를 만들어서 시민들하고 나눠 먹었다. 그러고 있는데 "어! 배우님! 노란리본 배우님 아니에요?"라고 하시더라. 연예인처럼 우릴 알아보시는데, 신기했다.
예진 엄마 : 우리가 광화문에 가면 많이 알아보시더라. 너무 신기했다. 그때부터 불러주셔서, 광화문 블랙텐트(*참고: '광장극장 블랙텐트'는 예술인·노동자·시민 70여 명이 함께 설치한 임시 공공극장으로, 지금은 해단했다)에서 공연도 했다.
영만 엄마 : 그때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엄청 추웠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담요를 두르고 줄 서서 기다리는데, 그거 보면서 감동했다. 연극을 그만둘 수 없는 이유가 그런 것도 있다. 어디서 내가 그런 관객을 만나겠나.
윤민 엄마 박혜영(이하 윤민 엄마) : 감동이지. 진짜 우리 주위에 좋은 사람이 되게 많다.
▷ 함께하는 사람들의 그런 관심과 응원도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영만 엄마 : 어폐가 있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됐고 외롭지 않게 응원받고 있다는 거, 그건 너무 감사한 거다. 아이들이 함께 희생된 걸로 인해 사람들이 잊지 못할 아픔으로 갖고 있으면서 우릴 응원하고 있다는 게 말이다. 나 혼자만, 아무도 모르는 슬픔이 말이다.
윤민 엄마 : 안 그랬으면 여기까지 못 왔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이 부러워한다고 표현하면 그런데, 그런 게 있다. 그분들 입장에서 지역도 안산, 같은 부모라는 게 단합 소스가 되니 부러운 거다. 이태원 참사 분들은 각지에서 모이기도 쉽지 않다. 모여서 싸워야 하는데 뭉치는 자체가 쉽지 않다. 정부가 참사당한 사람들을 대하는 요령을 익힌 거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이미 겪었기에 이태원 참사를 옆에서 어떻게 도울지 아는 거다. 그래서 싸움이 더 치열해질 수 있는 거다. 우리한테 여태까지 버틸 수 있었던 노하우를 알고 싶다고 묻는 데 노하우가 없는 일이다. 죽기 살기로 해야만 하는 일이다.
영만 엄마 : 부모의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부딪히는 거다. 공부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 죽기 살기로 버텨온 노력이 조금씩 조금씩 우리 사회에 알게 모르게 변화를 끌어내고 있는 것 같다.
윤민 엄마 : 그런 면에서 세월호 유가족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더 하게 된다. 10년 동안 같이 뭉쳐서 지금도 계속 활동하고 목소리를 낸다. 이런 사람들이 없다. '선례'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데, 우리는 선례를 만드는 사람이 된 거다. 이런 점에서 세월호 유가족이 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본다. 그런 거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세월호 있고 나서 우리나라가 안 변한 게 아니다. 엄청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사고가 나면 그걸로 끝이었다. 개인의 문제로 끝났다. 그러나 지금은 사고가 나면 대책위 생기고, 진행된다. 세월호 이후 일어난 현상이다. 세월호 이전에는 그냥 평범한 엄마였던 사람들이 세월호를 겪으면서 활동가가 되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면서 한국을 조금씩 바꿔가고 있다.
그래서 10년 동안 바뀐 게 뭐가 있냐, 진상규명이 됐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우리한테 와 닿는 건 아직 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애석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우리는 오로지 자식만 보고 가는 사람들이었기에 여기까지 온 거다. 지금 남아있는 유가족들은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사람들이다. 이분들이 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혼자 했다면 못 했다. 진작 나가떨어졌다. 내 옆에서 같이 걸어줬기에 10년을 버틸 수 있었다.
영만 엄마 : 21세기에 가장 많이 변화하고 이 시대에 발맞춰 가장 많이 바뀐 건 세월호 유가족인 거 같다. 우리 같은 사람이 투쟁을 알았겠나, 뭐를 알았겠나. 새끼 보내놓고 이게 뭔지도 모르고 해야 하는 줄 알고….
윤민 엄마 : 여기서 포인트는 다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라고 하면 못할 거 같다는 거다.
예진 엄마 : 할 수 있지 왜 못해. 더 한 것도 못 한 게 있어서 아쉬운데.
윤민 엄마 : 처음이니 여기까지 왔지, 이 과정을 다 아는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면 못할 거 같다. 그때는 뭣도 모르고 달려든 것도 있다.
영만 엄마 : 그때는 이런저런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한 거다. 이리 재고 저리 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 삭발도 하고 단식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했지 싶다.
'유가족다움'이란 프레임 넘어 새로운 모습으로 기억해주길
▷ 그런 점에서 연극 무대는 세월호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담은 '장기자랑' 역시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선으로 세월호를 봐달라고 이야기한다.
영만 엄마 : 지금은 점점 세월호가 큰 이슈가 되지 않으니…. 그래서 지금 이 영화도 기를 쓰고 홍보하려는 거다. 영화를 보고 "세월호 참사를 내가 잊고 있었네"라며 다시 세월호를 되새기고, 다시 거론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극은 늘 보는 사람이 보러 오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막 "세월호!!!" 이러지 않으니까. 그냥 궁금해하면서 봤으면 좋겠다.
예진 엄마 : 예전 알던 지인들에게 영화를 소개했다. 우리가 "영화 봐줘서 고마워요"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이런 영화를 소개해줘서 너무 감사해요"라고 말하는 걸 듣고 싶었다. 어떻게 내가 이런 영화를 볼 수 있게 해줬냐고, 이런 감동을 받고 주변에 홍보했으면 좋겠다.
윤민 엄마 : 우리가 앞으로는 밝게 다가가야 한다.
예진 엄마 : 그런데 나도 모르게 프레임이 있었다. 유가족다움이.
영만 엄마 : 처음에 사람들이 엄마가 잘살아야 영만이도 보면서 행복할 거라고 했는데, 그때는 그 말이 귀에 하나도 안 들어왔다. 날 잘 아는 PD가 14년도부터 지금까지 영만 엄마로 살았는데, 이미경으로서의 삶을 보고 싶다며 공연을 제안했다. 내가 탬버린을 기가 막히게 잘 흔든다. 내 안에 흥이 있다. 그런데 유가족으로서 활발한 나를 보여줄 수 없으니 내가 죽겠는 거다. 그걸 공연하면서 보여준 거다. 내 안에 영만이가 살아있다고 하는데, 내가 슬프면 영만도 슬픈 건데, 그러지 말아야지.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이런 사람이라는 걸 보여줬으니, 원래 내 모습대로 살아야겠구나. 처음 사람을 만나면, 사람들은 세월호 가족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한다. 그래서 난 사람을 만나면 먼저 덥석 안아준다. 그래서 지금도 버릇처럼 사람을 보면 덥석 안게 됐다.
예진 엄마 : 이야기 자체도 꺼내지 못한다. 우리 상처를 건들까 봐.
▷ 나는 자식의 입장이라 그런지 몰라도, 엄마가 나를 슬프게만 기억하면 마음이 아플 것 같다. 분명 행복한 시간도 많았는데 말이다. 그런 점에서 엄마들이 충분히 희로애락의 '로'와 '애'만이 아니라 '희'와 '락'을 느끼는 걸 어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도 세월호 유가족을 미안함만으로 대하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이소현 감독(이하 이소현) : 예진 어머님도 바뀌게 된 계기가 있다. 예진 어머님이 대구 팬분들이 많다. 그래서 대구에 가면 자유로워진다고 하시더라. 대구에 시사회를 갔는데 진짜 깜짝 놀랐다. KTX 역 앞에 고급 승용차가 딱 대기하고 있더라. 어머님을 모시고 극장 앞까지 갔다. 무대 인사를 갔는데 팬분들이 피켓 들고 계셔서 정말 놀랐다. 팬분들이 이태원 참사 지지 서명도 해주고, 정말 모든 게 일사천리로 됐다.
영만 엄마 : 보수 진영인데도 그렇게 응원이 어마어마하다.
이소현 : 본인이 항상 유가족다움에 갇혀 있었는데 대구에 올 때는 그게 지워지는 거 같다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받아줄 준비가 된 곳에서는 어머님들께서도 좀 자유로워지시는 거 같다.
영만 엄마 : 그렇다고 슬프지 않고 아프지 않은 게 아니다. 일상에서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들과 즐겁게 행복하게 지내면서 나도 힘을 얻는다. 나도 공연하면서 많이 바뀌었다.
예진 엄마 : 요즘 봄이니까 여지없이 노래 '벚꽃엔딩'이 나오는데, 우리 아들이 노래를 막 따라 부른다. 난 아이들 영상이 생각나서, 계속 슬퍼만 하면 안 된다고 해도 그게 잘 안된다. 그런데 아들이 "엄마, 누나 생각이 너무 나. 밝게 뛰어놀던 게 생각나. 그럼 엄마, 더 밝게 불러야 하지 않을까"라고 하더라.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쿵'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계속 바뀌는 거 같다. 밝았던 모습을 기억해주는 게, 아이들도 행복해할 거 같다.
영만 엄마 : 세월호를 모르는 사람들은 영화를 재밌게 볼 거 같다. 그러고 나서 끝나고 생각해보겠지. 이 영화가 이런 걸 이야기하고자 하는 걸, 나중에 깨달을 거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