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과 적성국을 가리지 않는 미국의 전방위 도청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한국의 경우도 최소한 박정희 정부 때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역사가 깊다.
지난 9일 폭로된 도청 정황도 미국의 글로벌 첩보 활동의 일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별로 새롭지 않다. 다만 윤석열 정부로선 시기와 상황이 좋지 않다.
한미동맹 강조하는 尹정부도 미국의 감시 대상…대일외교에 이은 뒤통수
이번 사건은 역대 최강의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윤석열 정부에 대한 미국의 감시라는 점이 우선 주목된다. 대미 추종외교라는 비판까지 받으며 공을 들여온 상황에서 이 폭로가 사실로 확인될 경우 세게 뒤통수를 맞은 셈이 된다.마침 올해는 한미동맹 70주년으로 범정부 차원의 성대한 기념행사를 기획하고 있고, 오는 26일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방문도 코앞에 둔 시점이다.
뉴욕타임스마저 한국 일반 대중이 "우리는 70년 동안이나 동맹관계인데 아직도 동맹에 대해 스파이 활동을 하느냐"고 묻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더구나 이번 사건은 윤 대통령이 일본에 '대승적 양보'를 했음에도 아무런 화답을 받지 못한데 이은 잇단 외교적 실점이라는 점에서 뼈아플 수밖에 없다.
외교가에선 윤석열 정부가 친미 성향인 것은 분명하지만 독자적 핵무장을 거론하는 등 미국 핵심 이익과 충돌하는 지점도 있음을 주시하고 있다.
외교안보라인 교체 배경도 재조명…우크라이나 소극적 지원이 원인?
미국의 도청 대상이었던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전 외교비서관이 잇달아 교체된 배경도 현 시점에선 더욱 석연치 않게 됐다. 알려진 대로 '블랙핑크' 때문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김 전 실장과 이 전 비서관은 작은 온도차는 있지만 우크라이나 포탄 지원에 대체로 신중한 입장이었다.
미국이 정말 이들의 대화를 엿들었다면 불편한 심경이었을 수밖에 없다. 뉴욕타임스는 "(이들이) 불분명한 이유로 지난달 사퇴했다"고 여운을 남겼다.
벌써부터 러시아가 이번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는 것도 간단치 않은 함의가 있다. 친러시아 세력이 미국과 동맹을 이간질하기 위해 공작을 벌였다는 음모론이다.
이는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게 틀림없다.
만약 러시아 개입설이 사실이라면, 러시아는 글로벌 첩보세계의 정점에 서있고 한국은 그 한참 아래에서 여기저기 정보를 뜯기는 신세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역대급 보안사고는 졸속 용산 이전 탓?…"한심, 비굴" 사후 대처도 문제
정부로선 사실관계 파악이 우선이라는 입장이지만 사실로 드러날 경우 역대급 보안 사고를 범했고 사후 대처도 아마추어급이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된다.
물론 미국의 한국 도청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가장 최근 사례는 2013년 7월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밝혀졌다. 당시 표적은 주미한국대사관이었지만 이번에는 대통령실이 뚫렸다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
일각에선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급히 옮긴데 따른 부작용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박정희 정부 이래 대대로 보안 관리를 해온 청와대에 비해 용산은 아무래도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부 전직 고위 관계자는 "터질게 터졌고 우려가 현실이 됐다"면서 "용산에는 주한미군의 (정보부대 같은) 여러 민감 자산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통령실이 사건 초기에 "미국과 필요한 협의"를 하겠다고 했다가 "필요할 경우 합당한 조치를 요청"하겠다고 뒤늦게서야 수위를 높인 것도 매끄럽지 않는 대응이었다.
유승민 국민의힘 전 의원조차 "한심하고 비굴하기 짝이 없다"고 비판할 만큼 여론 동향이 예사롭지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2013년 박근혜 정부 때만 해도 미국의 행태를 처음부터 '도청'이라 규정하고 공개적으로 사실관계 확인을 요청하는 등 지금보다는 단호했다. 보안 확보도 사후 메시지 관리도 이전만 못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