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기후 변화에 대응해 2032년까지 신차의 67%를 전기차로 대체하는 규제안을 추진한다. 미국산 전기차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이어 또 한차례 충격파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국내 완성차·배터리 업계는 미국의 급진적 행보에 고민이 깊어지면서도 이를 기회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보다 민첩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은 미국 환경보호청(EPA)이 오는 12일(현지시간) 승용차와 소형 트럭의 탄소 배출 기준을 전면적으로 강화하는 내용의 규제안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총 판매 차량의 탄소 배출 한도를 엄격히 제한해 2032년까지 판매 신차의 67%를 전기차로 채우겠다는 목표다. 차량 3대 가운데 2대를 전기차로 바꾼다는 얘기다.
앞서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2030년까지 미국에서 판매되는 전체 차량의 50%를 전기차로 대체하는 방안을 추진해왔다. 절반도 도전적인데, 이번에 발표될 탄소 배출 규제안은 그보다 목표치를 더 높였다. 지난해 미국에서 판매된 신차 중 전기차의 비중이 5.8%에 불과한 데에 비춰보면 67%라는 수치는 상당히 급진적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미국의 이같은 행보는 국내 완성차 업체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미국에서 147만4224대를 판매했는데, 그중 순수 전기차는 5만8028대로 집계됐다. 약 3.9% 수준이다. 현대차는 2030년까지 미국 시장에서 전체 판매 차량의 58%를, 기아는 북미에서 47%를 전기차로 채우려는 계획이었지만 EPA가 2032년까지 전기차 비중의 목표치를 67%로 잡으면서 기존 전략에 수정이 필요해졌다.
업계에서는 이에 따라 현대차와 기아가 각각 기존 앨라배마주 공장과 조지아주 공장의 전기차 추가 생산 시기를 앞당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미 두 회사는 오는 2025년 가동을 준비하고 있는 조지아주 내 전기차 전용 공장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의 완공 시기도 내년으로 앞당기기로 했다.
판매 목표치도 상향 조정할 가능성이 크다. 현대차는 2030년 전기차 판매 목표를 187만대로 설정한 상태다. 기아는 같은 시기 160만대를 전기차로 채우겠다고 발표했다. 양사 합쳐 347만대다. 지금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보다는 월등히 높아지지만, 여전히 전체 판매량의 40%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라고 한다. 일정 부분 수정이 불가피한 대목이다.
국내 배터리 업체에는 EPA의 규제가 기회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 등 K-배터리 3사가 이미 IRA 요건에 맞추면서 미국 내 입지를 다진 상황에 전기차 전환 확대 방안은 시장 규모가 커지는 동시에 시기도 앞당겨 현재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에 분명한 이점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EPA의 규제안이 과도하게 급진적이라 현실적으로 이를 충족하는 업체가 많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목소리도 나온다. NYT는 "미국 정부가 발표할 예정인 목표치는 자동차 업체 입장에서도 심각한 도전이 될 것"이라며 "모든 주요 자동차 기업이 전기차 생산 설비에 투자했지만 이같은 규모에 부합할 수 있는 업체는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