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 중 엄마 전도연의 모습은 많이 봤지만, 딸과의 관계를 고민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전도연의 모습은 어딘가 낯설면서도 새롭다. '전도연'이라면 무슨 상황에서도 당당할 거란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낯설고도 새로운 전도연에게 '업계 최강 킬러'라는 수식어까지 붙었다. 매직 뚜껑만으로도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고, 목에 빨간 선을 그은 뒤 "너 방금 죽었어. 비명도 못 지르고"라 말하는 전도연은 말 그대로 세계관의 끝판왕이다. 현실의 전도연처럼 말이다.
'길복순'이 가능했던 건 변성현 감독이 전도연의 열렬한 '찐팬'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길복순'은 전도연의, 전도연에 의한, 전도연을 위한 작품이 됐다.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변성현 감독은 전도연을 두고 '유니콘' '용' '해태'라 표현했다. 그의 유니콘이 어떻게 극한의 액션에 도전하게 됐는지부터 '길복순' 세계관 구축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변성현 감독의 우상 '전도연'에서 시작한 '길복순'
▷ '길복순'은 처음부터 배우 전도연을 놓고 쓴 작품이라고 했다. 감독에게 '배우 전도연'은 어떤 존재인가?
나한테는 완전 우상 같은 분이다. 분명 실존하고 있긴 한데, 눈으로 보기 전에는 못 믿는…. 마치 유니콘이나 해태나 용, 그런 존재다. 어릴 때부터 가장 좋아했던 배우다. 물론 설경구 선배님도 마찬가지지만, 만나고 또 오래 알다 보니 그게 많이 희석됐다.
▷ 현장에서 함께 작업하며 알게 된 전도연은 어떤 배우였나?
진짜 치열하고 자기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여 세운 다음 연기한다. 정말 본인을 계속 혹사한다. 사람들 앞에서는 누구보다 자신만만해하는데 속으로 들어가면 '난 이걸 못 해낼 거 같아'까지 만들어 놓은 다음 그걸 이겨내는 사람이다. 보면서 되게 많이 배웠다. 나랑도 되게 치열했다. 나도 나름 되게 열심히 하는 사람인데, 저렇게까지는 못할 거 같다. '전도연'처럼 살려면 인생의 한 부분, 내가 가진 행복 중 어떤 부분을 내려놔야 할 거 같다.
도연 선배가 배우라는 점을 킬러로 바꾼 거다. 세상 그렇게 당당한 그리고 사실 도연 선배님에게는 아무도 함부로 못 한다. 그런데 우리랑 같이 밥이나 술을 먹다가 아이랑 통화할 때 쩔쩔매는 모습을 봤다. 그게 되게 이상했고, 제일 재밌었다. 아이와 통화한 후 갑자기 모든 신경을 다 쓰더니, 영화 이야기를 재밌게 하고 있다가도 아이를 키워본 적 없는 주변 사람에게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진지하게 물어보는 게 재밌었다. 그게 너무 아이러니했다.
▷ 엄마 길복순과 딸 길재영의 관계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지점은 무엇인가?
엄마와 직업 사이 간극에서 아이러니라고 한다면, 내 윤리는 무엇인지 생각했을 때 본인이 본인에게 물어봤을 때 떳떳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복순이 민규에게 "쪽팔리잖아, 나한테"라고 한다. 그리고 굳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면, 맨 처음 생각한 게 엄마가 딸에게 문을 열어주는 영화라 생각했다. 특별한 주제 의식을 갖고 시작한 영화는 아니다.
▷ 엄마는 딸을, 딸은 엄마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애틋함이 묻어나온다. 이런 애틋함을 일부러 보여주고자 한 건가?
인지하고 다루려 했다. 사실은 모녀 사이에 벽이 있는 게 비밀 때문이다. 복순의 비밀은 정말 이야기하면 안 되는 비밀이어야 했고, 재영의 비밀은 사실 이야기해도 되는 거다. 절대 밝히면 안 되는 걸 알았을 때 딸은 문을 열어주는데, 이야기해도 되는 걸 받아들였을 때 엄마는 문을 안 열어주고 도망간다. 거기서 의도된 건 '레드'랑 '그린'이다. 액션 영화라는 외피를 갖고 있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쪽에 좀 더 가까웠다.
액션 영화,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 길복순의 액션 스타일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고민한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했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이 영화가 미국 코믹북을 보는 느낌이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히어로물이 보통 거기서 나오는데, '스파이더맨'만 봐도 현실적인 고민을 지닌 히어로다. 낙제하고 데이트는 안 되고, 그건 되게 현실적인 거다. 반면 거미줄 타고 날아다니는 건 비현실적이다. 일단 전도연이란 배우를 앞세웠는데, 도연 선배님은 체구가 작다. 작은데 되게 덩치 큰 상대를 만났을 경우 이게 너무 리얼하면, 물리력으로 말이 안 된다. 그런 걸 찍고 싶지 않았다. 이건 영화 자체가 그런 코믹스 풍이라는 걸 오프닝부터 설명하고 들어가려고 했다.
▷ 마지막 길복순과 차민규의 액션 신은 어떻게 만들었나?
약간 가짜 티가 나도 되니까 우아했으면 좋겠다는 점에 방점을 뒀다. 배우들은 120%의 노력을 했다. 사실 이걸 물론 정두홍 감독님이 하듯이 할 수 없다. 난 액션 영화를 보면 가끔가다 '저거 어떻게 어딜 때린 거지?'라는 생각이 든다. 타이트하게 끊어서 찍으면 타격감도 느껴지고 빠르게 흘러간다. 그러나 그러면 대역을 써야 하는데, 우리는 우리가 만든 액션 콘셉트를 지키기 위해 배우들이 액션을 직접 해야 했다. 그래서 배우들이 더 피곤했고, 누가 보기엔 액션이 조금 아쉬울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잘 디자인됐다고 생각한다.
▷ 이번 영화를 찍고 난 후 다시는 액션 영화 안 한다고 했다.
다시는 액션 영화를 하고 싶지 않아졌다. 보통 액션 영화를 보면 주인공 캐릭터가 무명의 다수와 싸우는 신이 많다. 근데 우리는 모두가 캐릭터성이 있는 사람들이 싸우게 하기로 했다. 그러려면 액션 전문 배우가 아닌 배우들이 직접 해야 하는 거다. 액션에 특화된 배우들이 아닌데, 이 배우들을 데리고 액션 영화처럼 찍으려 하다 보니까 이게 너무 힘들어지는 거다.
하면서도 너무 못할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감정 연기는 서로 같이 부딪히며 쥐어짜면 되는데, 인간에겐 몸의 한계치가 있다. 그리고 일반 배우들과는 온전하게 마음에 들 때까지 찍을 수가 없다. 그리고 내가 사람을 되게 괴롭히는 것 같고, 실제로 배우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같이 힘들다. 액션 영화 시나리오를 쓸 수는 있지만 연출은 이제 못 할 거 같다.
칭찬은 변성현 감독을 자랑하게 만든다
▷ 영화 속 킬러와 그들이 선택하는 작품의 등급을 분류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어딜 가든 그게 정해진다. 꼭 직급이 아니라도 말이다. 나는 주로 배우들보다 스태프와 자주 어울리고 술을 먹는데, 그러면 서로 얼마 받는지도 궁금하다. "어느 촬영감독님은 A급이잖아"라고 말한다. 같은 일을 하는데도 그런 게 있다. 그게 세상사는 사람들 같고, 직장 생활은 안 해봤지만 다 그럴 거라 생각해서 내가 살면서 느낀 것들을 넣었다.
▷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차민규 동생 차민희라는 캐릭터는 어떻게 탄생한 건가?
민희는 유아기적인 사람이라 생각한다. 자기가 갖고 있는 걸 뺏기면 다 망쳐버리는, 아무 일도 안 벌어질 수 있는데 갑자기 물을 끼얹는 거다. 유아기의 특성이 어릴 때 '아빠랑 결혼할 거야' '오빠랑 결혼할 거야' 그런다. 거기서 못 벗어난 아이로 생각해서 그런 식으로 설정했다. 그래서 바나나 우유를 마신다든가, 유독 환하게 웃는 사람은 차민희밖에 없다.
▷ 배우의 얼굴 각도까지 세세하게 디렉션한다고 들었다. 이런 방식이 전도연에게는 처음엔 낯설었지만 나중엔 재밌어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때 디렉션 했을 때는 조명 문제가 있었다. 전도연 선배님이 그동안 되게 현실적인 걸 많이 하셨는데, 이번에는 만화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처럼 보이게끔 하고 싶었다. 도연 선배를 제일 예쁘고 제일 매력적으로 찍고 싶어서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얼굴 각도를 조절했던 건, 오른쪽 얼굴일 때는 '엄마 길복순'으로 두고 왼쪽 얼굴일 때는 '킬러 길복순'으로 두고 콘티를 짰다. 민규랑 이야기하다 돌아가면 엄마 얼굴이 되고, 그런 걸 계산했다. 그런 것들을 다 맞추려 하다 보니 그랬다. 아는 사람들만 알게 보이겠지만, 이번에는 영화를 찍으면서 우리끼리 법칙을 세워놓고 찍어서 그런 디테일한 디렉션이 있었다.
▷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부딪히도록 만드는 원동력을 무엇인가?
칭찬받는 걸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칭찬이 있고, 들어도 그냥저냥인 칭찬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칭찬을 받으면 숨기지 않고 자랑하는 편이다. 예를 들면 인정하고 존경하는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거나, 미국에서 제안이 들어왔다거나, 어떤 배우가 나랑 일하는 게 너무 좋다고 했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그러면 숨기지 않고 내 주변 사람에게 다 알리는 편이다.
▷ '길복순' 공개 이후 주변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은 칭찬을 받은 게 있을까?
되게 사소한 거였는데, 도연 선배님이 제 디렉션이 되게 재밌다고 하셨다. 또 다른 감독님을 말하면서 이 사람이랑 이 사람이 제일 재밌다고 하셨다.
그리고 얼마 전 이명세 감독님이 영화를 보신 다음에 문자를 남기셨다. 영화감독이 사라져가는 세상에 영화감독으로 남아줘서 고맙다고, 많이 배우고 간다고 하셨다. 그리고 막걸리 먹으며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다고 하셨다. 정말 까다로운 분이신데…. 베를린 발표 날 때보다 더 좋았다. 너무 영광이어서 바로 내 주변 친한 사람들에게 다 자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