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7년 벌어진 '재일유학생 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수사 결과 발표나 불법 구금뿐만 아니라 지명수배도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봐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모두 수사절차의 일환이라는 취지다.
9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양관수씨와 그 가족 14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불법 구금, 가혹행위 등 위법한 방법으로 수집된 증거에 기초해 이뤄진 수사 발표, 보도자료 배포, 원고에 대한 지명수배는 모두 수사 절차의 일환으로 전체적으로 위법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를 판단할 때는 직무집행을 전체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며 "수사 발표나 보도자료 내용에 비춰 원고에 대한 지명수배가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이었고, 원고는 검거를 우려해 10여 년 동안 귀국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양씨가 입국하자 수사기관에서 바로 임의동행한 것도 지명수배로 인한 것"이라며 "지명수배 조치가 불법 구금을 쉽게 했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또 양씨에 대한 수사 결과 발표와 보도자료 배포만 '중대한 인권침해 및 조작 의혹 사건'에 포함하고 불법 구금은 그 대상이 아니어서 소멸시효가 만료됐다고 본 원심 판단은 잘못됐다면서 다시 심리하게 했다.
재판부는 "원고에 대한 수사 발표와 보도자료 배포, 지명수배, 불법 구금 모두 중대한 인권침해 및 조작 의혹 사건을 구성하는 부분인 만큼 일부만 떼어내 과거사정리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앞서 2심은 "안기부의 지명수배는 피의자의 소재를 찾기 위한 수사 방편으로 수사기관 내부의 단순한 공조나 의사 연락에 불과하다"며 "안기부가 지명수배의 원인이 된 피의사실을 조작한 정황이 있더라도 지명수배 자체를 위법한 공권력 행사라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1987년 당시 일본 유학생이던 장의균씨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와 접촉해 간첩 활동을 했다고 발표하면서 지령을 내린 인물로 양씨를 지목했다.
장씨는 이 사건으로 징역 8년의 실형을 확정받고 복역했다. 하지만 불법 구금 상태에서 강압 조사를 받은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재심 끝에 2017년 12월 무죄 판결을 확정받았다.
한편 양씨는 안기부의 수사 결과 발표 이후 지명수배돼 계속 일본에 머물다가 1998년에야 귀국했고, 검찰 조사 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후 양씨와 가족들은 안기부의 위법한 수사로 피해를 봤다며 2018년 소송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