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 '여인 2'의 주인공 수현('접속'), 강원도 산골 산리 마을 늦깎이 초등학생인 홍연('내 마음의 풍금'), 권투장 라운드걸 출신으로 퇴물 복서의 정부가 되어버린 수진('피도 눈물도 없이'), 아들과 함께 죽은 남편의 고향을 향해 가던 신애('밀양'), 대의를 지키는 검 월소('협녀, 칼의 기억'), 사람을 죽이고 잠적한 박준길의 애인 김혜경('무뢰한'), 과거를 지우고 새 인생을 살기 위해 남의 것을 탐하는 연희('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그리고 열일곱 살 때 처음 살인을 한 후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업계의 전설적인 킬러 길복순까지, 전도연은 늘 관객을 놀라게 한다. 이런 모습이 있었을까 싶으면 다음 작품에서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연기를 보여준다고 놀라면 다음에는 또 다른 연기로 관객의 마음을 훔친다.
누군가는 '밀양'으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탄 전도연을 두고 '정점'을 찍었다고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전도연은 매 작품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새롭고 놀라운 '배우 전도연'을 보여줬다. 그래서 '길복순'은 더욱더 기다려졌고, 더욱더 만족스럽게 "역시 전도연"을 외치게 했다. 전도연은 그렇게 '계속 궁금하고 기대되는 배우'이고 싶다고 했다.
복순이가 바라고, 또 보고 싶은 '길재영'이란 세계
▷ 영화를 관통하는 이야기가 바로 길복순과 딸 재영의 관계다. 복순은 킬러지만 딸만은 자신의 세계와 먼 평범한 세계에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이 큰 거 같다.
복순의 세상은 '레드'다. 핏빛 세계에 있는 인물인데 자기가 보고 싶은 세계는 그린이고, 딸 재영이 그린이다. 이런 은유적인 건 감독님과 함께 GV(관객과의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된 거다. 다른 모습을 보고 싶고, 다른 세상 사는 딸을 키우고 싶었던 거 같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그린과 레드가 대조적으로 많이 나오는데, 그린은 복순이가 보고 싶은 세계다.
그리고 모녀 사이에 비밀이 있는데, 그 비밀을 다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어느 순간 딸이 그런 엄마를 받아들이고 엄마가 딸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했을 때 개인적으로 관계를 지키는 데 있어서 비밀을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관계를 지키기 위해 비밀도 필요하다 본다. 모든 관계가 그렇게 유지되고 있는 거 같다.
▷ 길복순은 차라리 사람 죽이는 건 심플하다며 딸 키우는 걸 더 어려워한다. 전도연도 그런 순간을 맞닥뜨리나?
진짜 애 키우는 건 심플하지 않다. 복잡한 거다. 연기도 심플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명확한 지점이 있는데 아이 키우는 건 그렇지 않은 거 같다. 계속 현재진행형이다. 작품은 끝나면 결과물을 볼 수 있는데, 아이 키우는 건 그거랑 다른 문제라서 아이 키우는 게 더 복잡하고 힘든 거 같다.
▷ '일타 스캔들'과 '길복순'에서 보여준 '엄마' 캐릭터는 이전 영화 속 엄마와는 조금은 결이 다른 것 같다.
그 전에 '생일'에서도 그렇고 내가 했던 엄마들은 어떻게 보면 현실적이지 못한 엄마였던 거 같다. 모녀 관계의 현실적인 모습이 보이지는 않고, 엄마로서의 역할만 보여줬다. 정말 엄마와 딸의 관계를 현실적으로 보여준 건 '일타 스캔들'과 '길복순'이다.
전도연이 얻고 싶은 수식어
▷ '길복순' 속 전설적인 킬러이자 업계 톱인 길복순을 향한 존경뿐 아니라 시기와 질투도 존재한다. 현실과 비슷한 점이 있을지 궁금하다.
킬러이긴 하지만 "슛 들어가요" "리허설해요" 등 쓰는 언어가 비슷하다. A급, B급 경계를 나누는 것도 그렇고. 엔터 업계도 A 단계에 오르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길복순이 속한 회사를 '엔터'라고 한 것도 감독님이 직업만 다르지 이러한 일환으로 연결해서 썼다고 하더라. 그런 게 비슷하다. 그리고 시기와 질투라는 건 누구에게나 다 있을 수 있고 나한테도 있을 수 있다. 보이지 않을 뿐이지 다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도 그렇다. 누가 잘 되면 배 아프고.(웃음)
▷ 영화 속 길복순처럼 자신이 선택한 작품이 자신의 철학이나 신념과 맞지 않을 경우 현실의 전도연은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궁금하다.
없다고도 볼 수 없지만, 난 내가 그렇게까지 신념이나 철학이 있는 거 같진 않다. 일로써 부딪히는 부분들은 이야기한다. 내가 틀릴 수도 있는 거다. 이해되는 건 이해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나로서도 어필하고 맞춰가는 스타일인 거 같다. 내가 옳기 때문에 이래야 한다는 건 아니고 맞춰가는 거 같다.
그리고 난 해내야 할 부분은 해야 한다. 이건 내 개인과 다른 작품에 대한 이야기다. 이 작품을 하겠다고 하면, 난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그 인물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 인물로서 이해하고 맞다고 생각하면, 날 이해시킬 수 없는 상황이 생길 경우 내가 이해하는 걸 이해시키려 한다.
▷ 이전에 상업영화에 대한 목마름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길복순'을 통해 갈증이 좀 풀렸나?
계속 가야지 않겠나. 잠깐 물 한 잔 마셨다고 갈증이 해소되는 건 아니다.(웃음) 사실 상업영화가 어떤 영화고 아닌 영화가 뭔지 잘 모르겠다. 작품을 선택할 때 이야기가 재밌으면 선택한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동안 그렇지 못했기에 그에 대한 답답함은 있었다.
흥행적인 건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 부분 때문에 '길복순'을 선택한 건 아니었는데 너무 감사하다. 그전에도 알고 있었겠지만, '일타 스캔들'이나 '길복순'으로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전도연이란 배우를 알게 된 거 같다. 그래서 앞으로 내가 작품을 선택한다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는 생겼다.
▷ 배우로서의 욕망이 있다면 무엇일지 궁금하다.
매번 글로벌 1위를 하고 시청률 17% 찍는 작품을 할 수는 없다. 이런 작품이 있어 주는 건 너무 감사하다. 내가 선택한 게 틀리지 않았고, 뭔가 잘 해왔다는, 나에게는 위로와 힘이 되는 시간인 거 같다. 흥행하는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 모르고, 그렇게 선택해 본 적은 없다. 앞으로도 지금까지와 똑같을 거 같다. 이런 시간이 스스로에게 잘 해왔고 앞으로 잘 해낼 것이란 힘이 되는 그런 작품이고 시간이지 않을까.
▷ 앞으로 듣고 싶은 수식어가 있나?
'밀양'으로 칸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오니 사람들이 "전도연의 정점이다" "전도연에게 뭐가 더 있을까"라고 많이 이야기했다. 그때 '접속'에 캐스팅해준 심재명 대표님이 나는 이게 너의 정점이 아니라고, 네가 너무 궁금하다고 말씀해주셨다. 얼마 전에도 문자로 '길복순'을 보고 너무 좋았다고,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앞으로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고 해주셨다. 나한테는 그게 힘이 된다. 계속 궁금하고 기대되는 배우이고 싶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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