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을 말해? 핏줄이 그렇게 쉽게 안 끊어져요. 동사무소 가서 서류 한 장 떼면 너 어디 있는지 다 나와. 어디 또 숨어봐. 내가 찾나, 못 찾나." _'더 글로리' 12화 중 정미희의 대사
'핏줄'이란 이유로 문동은(송혜교)과 그의 엄마 정미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묶였다. 미희가 동은을 향해 한 말은 저주처럼 동은을 옭아맸다. 동은은 엄마 미희에게서 견딜 수 없는 밑바닥을 봤고, 자신을 버린 엄마에게 '핏줄'로 할 수 있는 최고의 벌을 내린다.
동은 엄마 미희가 나올 때마다 시청자들은 '찐 광기' '분노유발자' 등의 수식어를 소환한 것은 물론 "빡친다"('화나다'를 속되게 이르는 말)는 말로 동은 대신 분노를 표출했다. 그만큼 정미희는 동은의 가장 첫 번째 가해자이자 최고의 가해자였다. 동은을 응원하는 모든 시청자가 정미희를 보며 울화가 치밀 수 있었던 건 배우 박지아 덕분이다.
박지아는 설레는 마음으로 펼친 대본에서 생각했던 것 이상의 정미희를 마주했다. 대본 속 대사와 지문, 자신만의 서브 텍스트(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숨은 맥락)를 찾아내며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정미희를 구축해갔다. 근 9개월에 이르는 공백 기간에도 정미희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고 7㎏ 감량한 몸을 독하게 유지했다.
그렇게 완성된 게 우리가 본 '정미희'다. 스스로도 독하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지만, 박지아는 행복했다. 지난 3일 서울 양천구 목동 CBS노컷뉴스 사옥에서 만난 박지아에게서 정미희를 연기하며 어떤 행복들을 만났는지 이야기를 들어봤다.
박지아가 정미희를 만나 지독하게 만들어가기까지
▷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 엄마 정미희 역으로 열연을 선보였다. 이에 대해 극찬하는 시청자도 많았다. 요즘 인기를 실감하나?
길을 다니면 예전에는 아는 척을 소심하게 하셨다. "누군가 봐"라며 소근소근하고 가셨는데, 요즘은 과감하게 들이대신다.(웃음) 잘 봤다고 하시고, 사진도 찍어달라고 하신다.
▷ '더 글로리'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대체로 김은숙 작가님 작품 들어간다고 하면 배우들 사이에서 술렁술렁한다. 난 거기 속하지 않는 사람이어서 나와 연이 될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번에도 술렁술렁하기에 다른 때처럼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는데 감독님 미팅이 잡혔다. 오디션을 보겠거니 하고 갔는데, 감독님이 나에 관해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이후 대본을 받아 가서 분석하라고 하시더라. 연기하면서 같이 하게 될 거라 생각도 못 했던 분들인데, '와, 이런 일이 생길 수 있구나' 싶었다.
▷ 김은숙 작가가 안길호 감독에게 박지아를 추천했다고 들었다. 혹시 촬영 전후로 김은숙 작가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나?
작가님이 언뜻 이야기하시기로 내가 나온 작품을 다 봤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내가 왜 그걸 다 보셨냐고 그랬다. 추천해드리고 싶은 것도 있지만 사실 얼굴이 빨개지고 나만 아는 비밀 같은 게 있는데….(웃음)
▷ 처음 대본을 읽고 난 후 생각한 정미희는 어떤 인물이었나? 그리고 연기해 나가면서 더 깊게 들여다본 정미희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배역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미팅 끝나고 대본을 꼭 안고 와서 첫 장을 펼치는데 너무 설레더라. 도대체 동은 엄마 정미희는 어떤 사람일까 설레면서 대본을 펼쳤다. 일단 내가 나오기 전 상황부터 대본을 보는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와, 어떻게 하면 이렇게 쓸 수 있지?' 그런 느낌이었다.
처음 본 정미희는 이발소에서 일하는 아줌마인 듯 아가씨인 듯 한 어떤 여자로 나오더라. '어? 매력적인데?' 몇 장 더 넘기니 딸을 팔아먹더라. 한 가정의 엄마 역할 그쯤이라 생각했는데, 그걸 넘어가겠구나 싶었다. 무게감이 내게 드리워지면 어쩌나 하면서 읽어나갔다. 이후 18년이 지난 다음 재등장하는데,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 변화를 갖는 시간도 찾아야 했고, 왜 이 엄마는 18년 전 딸을 그렇게 팔아먹었을까. 한 인간 혹은 자기 자식을 왜 그렇게 해야 했을까. 그런 고민이 나온 파트 1 이후 빈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 18년 채우기 위해 대본에 내가 나오지 않는 부분에 나온 소스도 짜깁기하고, 그걸로 얼개를 짜고, 조각상을 만들면서 정미희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만들어갔다.
송혜교한테 충격받은 그날 그 장면
▷ 파트 1과 파트 2의 정미희는 처한 상황만큼이나 외형적인 모습도 달라졌다.
사람의 인생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인과응보를 벗어날 수 없지 않을까. 그렇게 한 사람이 18년 후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모습에 편차가 생기게끔 하고 싶었다. '이렇게 사는 게 나에게 의미가 있나?' '나란 존재는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깊이 갖고 싶었다.
그래서 정서는 바닥까지 끌어내리고, 몸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물기를 다 빼려고 했다. 부러뜨리면 부러질 거 같고, 아주 마른걸레마냥. 그래서 7㎏ 정도 빼고, 이걸 8~9개월을 유지했다. 되게 지독하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웃음) 다 내 만족이다. 작품과 역할을 위해서 이렇게 하고 있다는 만족감. 그래서 되게 힘들었지만, 되게 행복했다.
▷ 개인적으로 정미희의 결말에 대해 만족하나? 그에게 어울리는 결말이라 보나?
만족한다. 미희가 동은에게 그렇게 강조하던 핏줄이 동은을 너무나 힘들고 괴롭게 했다. 방송으로 보면서도 내가 동은이라면 저 여자를 찢어 죽인다 한들 아픔이 없어질까 싶었다. 작가님께서 핏줄이란 부분을 잘 이용해서, 그것도 동은의 인성을 바탕으로 나이스하게 마무리하신 것 같다. 동은이는 멋진 친구니까.
▷ 동은의 집에서 동은과 다투다가 집에 불을 내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동은의 모든 것이 쏟아져 나오는데, 시청자뿐 아니라 배우들 역시 그 장면을 인상 깊은 장면으로 꼽는다.
그 지점이 동은과 미희의 클라이맥스다. 동은이 거의 무너져서 다 해체되는 수준으로 절규하게 되는 신이었다. 혜교씨가 그렇게 울부짖는 장면은 어느 드라마에서도 본 기억이 없다. 내가 정미희로서 인생을 갈아 넣고 엄마로서 동은에게 모든 걸 쏟아냈는데 동은이 싹 다 가져가서 나한테 다시 던져줬다. 내가 무언가를 했을 때 혜교씨가 안 받아주면 끝나는 거다. 근데 내가 하니까 날 아주 강렬하게 바라보면서 집중하게 해줬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혜교씨는 마치 아주 깜깜한 숲속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혼자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힘이 나에게 오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잘 받아낼 수 있을지 생각했다. 배우로서 겁이 났다. 내가 먼저 찍은 후 혜교씨 신으로 넘어갔을 때, 저러다 쓰러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동은으로서의 인생을 거기다 다 쏟아냈다. 혜교씨 공이 크다.
▷ 서로 합이 잘 맞았고, 그렇기에 명장면이 탄생한 것 같다.
송혜교 배우한테 충격을 받은 날이었다. '저 사람 뭐지?' '왜 이렇게 잘하지?'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내가 되게 멋진 배우를 만났구나 싶었다. 행복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합이 잘 맞을 수 있나 싶었다. 혜교씨의 배려가 많이 있었다. 내가 낯선 연기를 많이 하는 편인데 그걸 기다려주고, 배려해주고, 싹 가져가서 자기 걸로 만들어서 쏟아냈다. 나한테는 아주 멋진 연기를 한 날로 아직도 행복하게 기억되고 있다.(웃음)
<하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