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진실버스 오른 이태원 참사 유족들…전국 순례하며 독립조사 촉구 ②"지금쯤 여행을 갔겠죠"…유가족은 왜 '진실버스'에 올랐나? ③[르포]"유가족도 모이면 가끔 웃어요"…연대·치유의 '분향소' ④[르포]"네가 살아야 자식 한 푼다"…단장지애 헤아린 '오월의 어머니'들 ⑤[르포]"놀고 앉았네"…죄 없는 자처럼 돌 던지는 당신들 ⑥[르포]'불쏘시개 전차' 대신 '방화범'만 기억하는 사회 (계속) |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지하 1층. 이곳에는 20년 전인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참사 희생자 이름을 새긴 추모벽이 있는 '기억공간'이 '숨겨져' 있다.
진실버스를 타고 전국 순회에 나선 지 8일째 되던 지난 3일, 10·29이태원참사 유가족은 휴식시간을 쪼개 일정에 없던 장소인 기억공간을 찾았다.
기억하려는 자, 감추려는 자
기억공간에 대한 길 안내가 워낙 눈에 띄지 않아 대구시민도 매번 가는 길을 헤맨다는 그곳. 기억공간 앞에 도착하자 주황벽의 동굴 같은 곳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에는 '여기는 기억공간입니다'라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동굴 안으로 들어서서 검게 그을린 벽을 마주하게 되면 그제야 대구지하철참사 당시의 참혹함을 느끼게 된다. 이곳을 찾은 이태원참사 유가족 산하 엄마의 눈에는 또다시 눈물이 고였다.
"기억하라고 해놓고는 벽으로 가려놓고, 기억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참 우리 아이들도 이런 식으로 묻히길 바라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분(대구지하철참사 유족)들도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곳(기억공간)을 얻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아이도 사람들 기억 속에 나오면 안 된다, 안 된다 하면서 이런 식으로 (추모시설이) 만들어질 수도 있겠구나"
산하 엄마는 눈에 띄지 않게 만들어진 대구지하철참사 기억공간을 보며 과거를 떠올렸다. 대구시는 참사 발생 바로 다음날 참사 현장인 중앙로역을 물청소했다. 대형 참사 현장이 훼손돼 당시 유가족이 대책본부장인 대구시장에게 항의했고, 결국 유가족은 청소 후 버려진 쓰레기더미에서 14점의 유해를 직접 수습해야 했다.
"(대구지하철)참사를 당하신 분들의 시신이 쓰레기 더미에서 나왔다고 뉴스로 들었거든요. 그때 너무 놀랐었는데, 여기 오니 그것도 기억이 나더라고요. 제가 너무 무관심 속에 살았나.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서 눈물이 났어요"
우리 사회는 대구지하철참사의 원인으로 '정신질환자 방화범'만을 기억할 뿐, 낮은 가격에 낙찰됐던 '불에 타는 전차'는 잊혀졌다. 대구지하철참사 희생자대책위원회 윤석기 위원장은 지난 4일 CBS노컷뉴스 취재진과의 전화통화에서 당시 유가족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펼쳤던 '기억 전쟁'을 소개했다.
"'대구 지하철 참사'라고 하면 방화범, 그 다음에 마스터 키를 뽑아 탈출한 기관사들의 책임을 많이 묻는데요. 우리는 그런 것들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불쏘시개 전동차를 허용한 잘못된 법과 제도가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해요. 2003년 당시에 이미 우리나라 기술력으로 불에 타지 않는 불연재로 만든 안전한 지하철을 만들어서 해외에 비싼 값에 수출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이어 윤 위원장은 모든 참사 유족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도대체 (내 가족이) 왜 죽었냐"라고 말했다. 이태원참사 유가족이 진실버스를 타고 10일간 전국순회하며 국가에 요구하는 '진상규명'은 9년 전 세월호참사, 그리고 20년 전 대구지하철참사 때도 유가족이 똑같이 바랐던 일이다.
"첫번째는 왜 죽었는지에 대한 원인을 알고 싶고, 두 번째는 다시는 그런 참사가 되풀이하지 않아야 된다는 소망을 갖고 있단 말이에요. 진단이 제대로 돼야 올바른 처방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지금 이태원 참사 같은 경우에도 이미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에서 초기에 (나온) 얼마나 거친 표현들이 많았습니까. '왜 남의 나라 귀신 놀이에 가서, 왜 쓸데없이 그런 데 가도록 부모들이 내버려 뒀냐' 이런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는데"
"사람이 축제에 참가하든 쇼핑을 가든 수영을 가든 스포츠 행사를 가든 콘서트를 가든 출근을 하든 생활공간 어디에 가든 안전이 보장되는 세상을 국민 누구나 바라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가는 것 자체가 나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온다고 생각되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런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보장해 주는 게 정부가 존재하는 이유죠"
사회와 다르게 흐르는 유가족의 시간
192명의 사망자와 151명의 부상자 등 총 343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대구지하철참사는 여러모로 이태원참사와 닮았다.대구시는 사고 발생 단 120여일 만에 합동장례식을 치렀다. 같은 해 8월 대구에서는 하계U(유니버시아드)대회 개최가 예정됐기 때문이다. 대구지하철참사로 아내와 딸을 잃은 전재영씨는 "대구시에서 수습을 빨리 끝내야 된다고 압박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대구지하철화재참사는) 시신이 불에 탔기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잘 모르잖아요. 유가족들끼리 약속한 게 모든 시신을 수습할 때까지, DNA 유전자감식으로 모든 시신을 판별할 때까지 장례식은 치르지 말자 이렇게 약속했어요. (왜냐하면) 사고 나고 일주일쯤 지나니까 대구시에서 이 사고의 피해자는 72명이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내가 피해자'라고 신고한 사람은 한 300명 가까이 됐어요"
"실종자 가족으로서는 '(내가) 이 사고의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구나' 두려웠던 거예요. (시신 수습도 하기 전에 후속 절차를 일방적으로 서두를까봐) 대구시, 경찰과 '모든 시신의 신원 확인이 끝날 때까지는 가족들에도 결과를 알려주지 말자'고 다 같이 약속했는데도 (약속을 어기고) 알려줬죠. 시에서는 어떻게든 빨리 수습하려고 한 거죠"
윤 위원장에 따르면 대구지하철참사 당일 대구시가 수습한 시신 중 신원이 확인된 이는 50여명 뿐이었다. 나머지는 실종자 상태로 있다가 수개월에 걸쳐 신원을 확인한 후에야 희생자가 됐다. 실종자 가족들이 참사 당일부터 대구시민회관에서 밤을 꼬박 새면서 '실종자가족대책위원회'를 구성했지만, 한 달여 뒤에야 사망자 유가족과 함께 '희생자대책위원회'로 통합했던 이유다. 이 과정에서 유가족을 향한 국가의 개입과 감시는 더욱 노골적이었다.
"저희 (유가족)들이 초기에 워낙 단결이 잘 됐다 그래야 되나. 그러니까 안기부나 경찰, 검찰, 이런 분들이 고향 집으로 전화하는 거죠. 부모님이나 친인척들은 놀라서 (대책위) 활동하지 말고 나오라고 할 거 아니에요"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는 참사 한 달여 뒤인 12월 10일 출범했다. 그러나 정부의 '관제 애도'는 대구지하철참사 때보다 더 급하게 이뤄졌다. 참사 발생 후 12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지난해 10월 30일 오전 9시 48분쯤, 윤석열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고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했다. 참사 당사자인 유가족도 모르게 위패도 영정도 없는 분향소가 설치됐다. 유가족들이 가족이 죽었다는 사실을 이제 막 전해들을 때, 정부는 이미 희생자를 떠나보낼 준비부터 서둘렀다.
분향소 위치를 놓고 서울시와 빚었던 갈등 또한 대구지하철참사 당시와 비슷하다. 서울시는 이태원참사 희생자 분향소 설치 장소로 녹사평역 지하 4층을 제안했지만 유가족은 이를 거부하고 서울광장 앞에 임시분향소를 세웠다.
대구지하철 참사 당시에도 대구시는 분향소 위치로 대구시민회관 2층을 제안했지만, 유족들은 이를 거부하고 대구시민회관광장 주차장에 직접 분향소를 설치했다. 윤 위원장은 이와 관련해 당시 언론에 '대구부시장 감금사건'으로 보도된 웃지 못할 일화를 소개했다.
"합동 분향소를 유족들이 돈을 내서 만들었어요. 토요일에 김기옥 행정부시장 주도로 대구시 5급 이상 공무원들이 운동화 신고 작업복 입고 목장갑 끼고 그거(분향소) 때려 부수러 왔죠. 그때 농사철이기 때문에 남자들은 농사하러 많이 갔어요.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현장을 지키고 있었는데. 한 100명 이상 이분들(공무원)이 와서 때려 부수려고 하는데 처음에는 막았어요. 그런데 부시장이 '지하철 사고로 죽은 사람들은 죽을 사람이 다 죽었지' 얘기한 거죠. 그러니까 아주머니들 할머니들 눈이 돌아간 거죠. 그럼 너도 한번 죽어봐라 해서 부시장을 잡으러 다닌 거죠"
"대구시민회관 주차장부터 도로를 뛰어다니고 난장판을 죽이다가(벌이다가) 우리(희생자대책협의회) 사무실로 오히려 수행비서, 중부서장과 함께 피신 온 거죠. 아주머니들이 사무실 밖에서 '부시장 내보내라, 부시장도 죽이고 우리도 죽겠다' 해서 내보내주지 않았고 나중에 119 와서 모셔가도록 했는데 그거를 언론에서 오히려 유족들이 부시장을 납치 감금했다고 (보도한 거죠)"
'우리 사회가 기억해야 할 진실'을 찾아서
이태원참사 유가족 유진 아빠는 추모벽의 이름을 찬찬히 살피며 틈새에 쌓인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냈다. 유진 아빠는 한 방송사 인터뷰를 통해 만나게 된 대구지하철참사 유가족 전재영씨를 떠올렸다. 유진 아빠는 추모벽에서 전재영씨의 아내 고(故) 박미영씨와 딸 고(故) 전혜진씨의 이름을 찾아보았다."엄마와 딸인데 (이름이) 옆에 있지 않고 떨어져 있는 거예요. (모녀 관계인 걸) 분명히 알았을 텐데. 정말 배려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윤 위원장은 "중앙로역 기억공간은 유가족이 투쟁한 결과물로서 그나마 지키고 있는 곳"이라며 "처음에는 시에서 유가족 의견을 3~4차례 수렴하겠다고 했으나 단 한 차례도 (의견 수렴) 없이 자기들 임의로 진행해버렸다"고 했다.
그는 "추모벽이든 추모탑이든 어떤 시설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절차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상징'을 만드는 과정에 당사자가 참여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것은 말 그대로 슬픔을 치유하고 정서적으로 건강한 시민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풀어주는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할 말을 못하게 하고, 의견 개진이 안 되고 단절돼 버림받았다. 우리(유가족)와 동떨어진 행위를 진행했다"며 "오히려 (이 곳이) 2차 가해의 한 현장으로서 자리 잡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기억공간의 유리벽 너머 검게 그을린 벽에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천국 가세요", "우리 지은이 너무 보고 싶구나" 등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유진 아빠는 대구지하철참사 현장의 검게 탄 벽을 보며 이태원역 1번 출구 해밀톤호텔 옆 좁은 골목길을 떠올렸다.
"여기 이런 글들이 사람들이 이태원에 포스트잇으로 붙여 놓은 거랑 똑같잖아요. 이태원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되게 아파요. 우리도 그 골목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으니까 정비를 하고 거기에 조형물 등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상인연합회하고 논의했거든요"
이태원참사 유가족들은 '그날의 진실'이 알고 싶어 10일간 독립조사기구 설치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진실버스에 올랐다. 이태원참사 특별법의 국민청원은 지난 3일 오후 3시 무렵 5만 명을 돌파해 국회의원 발의 없이 관련 상임위원회에 곧바로 상정할 수 있게 됐다.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이유가 독립된 조사기구를 통한 제대로 된 진상을 알고 싶다는 거예요. 누가 내 아이를 데리고 현장에서 병원으로 몇 시에 (이송했는지). 장소도 몰라요. 알려진 게 전혀 없어서 우리는 그것이 알고 싶다는 거예요. 그날의 진실. 참사 전, 참사 후, 참사 순간의 진실을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