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출판 만화의 대안처럼 여겨졌던 웹툰은 이제 전 세계적으로 주목 받으며 K-웹툰이라는 독보적 콘텐츠 장르로 거듭나고 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차별 재현과 혐오 배설의 장이 된 것일까.
지난달 21일 서울 중구 서울YWCA '성평등 미디어 아카데미'에서는 '뾰족한 마음' '젊은 만화가에게 묻다' '프로불편러 일기' 등을 집필한 위근우 웹툰 작가 겸 문화평론가의 강의가 열렸다. 그 동안 꾸준히 웹툰을 비롯한 콘텐츠 비평을 해 온 위근우 작가는 웹툰의 문제를 혐오와 차별이 난무하는 인터넷 문화전쟁 맥락 안에서 진단하고 그 대안을 모색했다.
'탈권위적 개인' 인터넷 문화 이식한 웹툰의 시작
그런데 2010년대 온라인에 소위 신우파 세력으로 대변되는 일간베스트저장소(이하 일베)가 떠오르면서 이 흐름은 특이점을 맞았다. 신좌파의 문법을 습득한 신우파 세력은 너무나 쉽게 혐오와 차별의 정서를 확산해 나갔다. 대상은 다양했다. 여성, 아동, 전라도 그리고 장애인까지.
위 작가는 "탈권위, 반권위적 개인의 등장과 차별주의 연결고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살펴보면 먼저 문화적 신좌파들이 주장한 위반의 문화가 있었다. '금지를 금지한다'며 새로운 정치적 언어를 만들겠다는 움직임이었다. 사회적 금기와 구속을 깨는 것, 즉 탈권위적 개인이 곧 정치적 자유와 진보로 여겨진 시절이었다. 그러나 도덕적 권위를 무제한 해체하면 옳고 그름의 기준은 어떻게 만들 것인지, 위반 그 자체를 위한 위반이란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고 짚었다.
이어 "이런 방식을 차별주의자, 인터넷 우파들이 잘 습득해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등장은 탈권위적 문화 안에서 보편적 도덕 붕괴에 영향을 미쳤다. 신우익 세력은 과거의 보수적인 가치를 외치지 않는다. 대신 차별을 농담처럼 사용하는 게 익숙하다. 일베 시스템을 보면 '일간베스트' 안에 드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웃기기 위해서는 도덕적 기준이 중요하지 않다. 결국 이런 문화를 무제한 허용했을 때 일베 같은 방식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금처럼 대규모 시장은 아니지만 웹툰은 당시 이러한 인터넷 문화를 압축한 하나의 콘텐츠였다. 초기 웹툰은 '엽기' 유머 정서, 기승전결이 없을 정도로 파편화 된 개인사 등을 다루며 점점 성장해나갔다. 웹툰이 인기를 끌면서 인터넷 하위문화로 여겨졌던 이 같은 정서들은 양지로 올라왔다. 플래시 애니메이션 마시마로를 비롯해 '마린블루스' '스노우캣' '낢이 사는 이야기' 등 '일상툰' 인기가 독보적이었고, 웹툰 작가 1세대로 불리는 강풀, 조석 등이 활약했다.
위 작가는 "인터넷 문화의 부분에 있어 웹툰이란 미디어 역시 탈권위성 안에서 도덕적 아노미로 빠질 가능성이 있었다. 2016년 조석 작가가 '개그 만화 그리기 어려운 날'이란 주제의 웹툰에서 '뭐만 하면 사람들이 불편해 한다'고 했다. '신과 함께' 시리즈 주호민 작가도 '시민독재'란 발언을 하고 취소, 사과한 바 있다. 결국 그동안 웃기다는 이유 만으로 차별과 혐오가 '밈'(meme·재미있는 말과 행동을 온라인상에서 패러디한 콘텐츠)으로 너무 쉽게 숨 쉬듯 용납된 게 있었던 거다. 작가 입장에서는 창작 제약, 검열로 느껴졌겠지만 이를 '대불편'이라고 하면 나아갈 수 없다"고 진단했다.
차별·혐오 정당화 하는 웹툰 '사이다 서사'
위 작가는 "여기에서 악역은 단순히 주인공의 '라이벌' 개념이 아니다. 본인 능력이 없는데 남을 탓하고, 거품 같은 인기를 날조로 만들고, '강약약강'(강한 사람에겐 약하고, 약한 사람에겐 강한) 같은 '비호감' 속성을 가진다. 연진이를 보면 '일진이 과거를 세탁해 자신의 능력이 아닌 준재벌 남편을 만나 잘 산다'는 설정이다. '사필귀정'도 있겠지만 '무능력자'에 대한 분노도 있다"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독자, 시청자들은 '비호감' 캐릭터가 빨리 사라지거나 '참교육'을 당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이런 캐릭터는 주인공의 빠른 계층 성장을 돕고 징벌을 정당화 한다. 절대 주인공이 '약자'인 상태에서는 징벌하지 않는다. 결국 도덕적 판단 여부와 별개로, '능력'이란 힘의 논리를 내면화 한 것"이라고 '비호감' 캐릭터의 작동 원리를 부연했다.
이를 거쳐 공정한 경쟁을 통한 승리를 표방하는 '능력주의 세계관'이 형성된다. 주인공이 능력만 갖추면 무엇을 해도 납득이 된다. 이를테면 계층 상승도 가능하고, 부와 명예를 얻는 것도 정당화 된다. 강한 육체나 권력을 얻은 주인공이 '비호감' 캐릭터에 공권력이 할 수 없는 사적 응징, 일명 '참교육'을 하면 정의가 구현된다. '사이다 서사'의 공통 정서이자 공식이다. 그런데 위 작가는 여기서 질문을 던진다.
"왜 주인공은 모두 '착한' 강자가 될까. 강해져야만 정의 구현이 가능하고, 그것이 상대를 절멸하는 방식이어야 할까. 능력은 모든 보상을 받아도 되는 절대적 개념인가. '비호감' 캐릭터는 과연 사회적 편견과 상관 없이 구성됐다고 할 수 있는가."
정답은 '아니다'. 능력주의 세계관 속에서 '비호감' 캐릭터의 공통점은 설정만 떼고 보면 약자 카테고리에 속해 있다는 점이다. 양다리를 걸쳐 남자친구에게 맞는 양다리를 걸친 BJ 여성, 아이들에게 이상한 가르침을 주는 페미니스트 여성 교사,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는 젊은 여성, 어린 나이에 범죄를 저지른 촉법소년 등은 모두 '참교육'을 당하지만 그 기저에는 '무능력한 약자에겐 그래도 괜찮다'는 혐오가 촘촘히 깔려 있다.
위 작가는 "약자가 국가에 차별 시정에 대한 요구를 하면 공정하게 경쟁시키라고 하면서 구조적 차별 문제를 능력주의로 해결하려고 한다. 이 시정 요구를 '더 해달라'고 징징대는 것이라 여기고, 부당한 인간이라며 참교육을 하고 싶어 한다"며 "이런 세계관 안에서 '비호감' 캐릭터는 살려 달라는 약자일 수도 있다. 일례로 웹툰 속 페미니즘 혐오를 보면 자기가 믿고 있는 스테레오 타입의 싫은 여성상을 징벌하는 게 너무 좋고 후련한 거다. '사이다'가 어떤 정의의 감정처럼 작동하는 것 같지만 평소 혐오하던 존재를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웹툰 공론장 기능 상실…차별·혐오 세력 집결만
위 작가는 "'바연길' 댓글창에 조직적으로 악플(악성 댓글) 테러가 벌어졌다. 일종의 사이버불링이었는데 작가가 사과까지 했다. 이슈를 빨리 수습해야 됐겠지만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니 사과는 잘못됐다고 본다. 여성이 그래서 우리도 미러링했다는 논리는 말이 안된다. 일베 뿐만 아니라 다수의 남성 온라인 커뮤니티가 '김여사' '김치녀' 등 여혐 단어를 쓰다가 '한국 남자'를 줄인 '한남'을 쓰니까 난리났던 맥락은 제외한다"라고 했다.
결국 '공론장'의 기능을 상실한 웹툰 댓글창에서는 작가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 아닌 '소비자 갑질'까지 심심찮게 일어난다. 각종 인신공격을 비롯해 여성가족부(이하 여가부)에 대한 가짜뉴스, 페미니즘 조롱, 여혐 실드 등은 당연하다. 웹툰 댓글창이 차별·혐오 세력의 결집 장소가 되어버린 셈이다.
위 작가는 "연예 뉴스 댓글이 폐지되면서 댓글을 달 수 있는 대중문화 영역이 웹툰 뿐이라 여기에 온갖 인신공격과 혐오를 배설한다. 그런데 이 시장에 학계나 비평가, 즉 담론을 리딩할 그룹이 없다. 작가들도 비평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 자정이 어렵다. 언론은 '과도한 페미니즘' '남혐 논란' 등 제목을 달아가며 이슈로만 기사화 하고, 문제 의식을 갖고 따져보지 않는다. 결국 이것이 어떤 문제, 여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정당 정치인이 여가부를 폐지하겠다고 하는 수준까지 간다"고 꼬집었다.
그는 '방어적 대안들'로 △차별금지법 통과에 따른 포털 혐오 표현 삭제의 근거 마련 △성공에 치중한 문화산업 언어에 포섭되지 않는 비평의 노력 △표현의 자유 대 검열이란 이분법 벗어난 재현 윤리 논의의 활성화 △사이다 서사, 혐오의 쾌감 너머 새로운 전망 보여주는 작품의 지속적 발굴 등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는 '각자도생의 언어에 포섭되지 않는 새로운 투쟁의 언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위 작가는 "결국 새로운 정치 언어, 각자도생의 언어에 포섭되지 않는 투쟁의 언어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다. 개별적인 주체성을 존중하면서 연대하고, 신우파가 흉내 낼 수 없는, 현실 문제를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더 나은 미래의 전망을 비추는 언어가 필요하다. 이를 어떻게 개발하느냐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라고 밝혔다.
또 "'혐오의 시대'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역사의 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포기하지 않는 거다. 조롱의 언어는 결국 상대편에게도 유용한 무기가 된다. 소비자 권력의 효용감에도 너무 도취되지 말아야 한다. 그럴수록 자본주의에 종속된 소비자 운동으로만 갈 수 있다. 또 경험적 세계에서의 선한 실천과 작은 승리는 인터넷 문화전쟁보다 더 큰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