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진실버스 오른 이태원 참사 유족들…전국 순례하며 독립조사 촉구 ②"지금쯤 여행을 갔겠죠"…유가족은 왜 '진실버스'에 올랐나? ③[르포]"유가족도 모이면 가끔 웃어요"…연대·치유의 '분향소' ④[르포]"네가 살아야 자식 한 푼다"…단장지애 헤아린 '오월의 어머니'들 (계속) |
5·18민주화운동 당시 다치거나, 남편과 자녀, 형제를 잃은 여성들의 쉼터인 '오월어머니집'. 이곳에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태운 진실버스가 지난 30일 도착했다. 오월어머니집에 들어서자 10여 명의 어머니들이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따뜻하게 안아주며 환대했다.
오월의 어머니들 "꽃피는 계절, 생때같은 자식들 얼마나 눈에 밟힐까"
오월어머니집 김형미 관장은 "친척들도 이해 못 하는 일이 생길 겁니다. (저희도) 밖에 나가서 '나 5·18 때 남편 죽었어, 자식 죽었어' 말 못 했거든요"라고 털어놓고는 "여기 와서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고 치유가 됩니다"라며 함께 모여 서로 돕는 까닭을 설명했다.김 관장은 "국가폭력에 시달림을 당한 어머니로서 이태원 참사 가족들을 안아주고 위로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어떤 말로 여러분 위로 하겠습니까. 마음만은 똑같다는 것. 진상 규명되는 날까지 연대하고 힘 모으고 연대의 마음 약속드린다. 이런 따뜻한 공간에 여러분을 모실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며 환영했다.
오월 어머니들의 따뜻한 환대에 이태원 참사로 20대 딸을 잃은 한 엄마는 "딸을 보낸 지 6개월 돼 가는데 어머님들 연세의 시어머니께 아직 딸아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 했다"며 "딸 이야기도 아픈데 어머니를 볼 자신이 없어서 아직 이야기를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며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5·18민주화운동 희생자인 고(故) 김경철씨의 어머니 임근단씨는 "실컷 울어버려. 울고 나면 마음이 조금 편하니까. 얼마나 마음이 아파"라며 눈물을 그칠 줄 모르는 유가족의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곁에 있던 오월어머니집 안성례 초대관장도 "기가 막힐 노릇이지. 딸 이야기를 하려면 울음이 먼저 나와버려서 말하기 힘들 테지만 그래도 가족이 합심해야 한다"고 위로했다.
"너는 어디 갔다가 이렇게 늦게 오냐. 또 너는 어째 요새 그렇게 말도 없냐는 (시어머니 말에) 이중삼중으로 상처받으니까 '사실은 어머니 손녀가 죽었어요'라고 말을 해야 해. 고비를 넘기고 이겨내야 해. 용기를 내서 꼭 말씀하세요"
안씨는 "자기가 안 당해보면 그런 미운 말이라도 안 했으면 좋겠는데 아주 인정머리 없는 성질로 말해서 가슴들이 아팠을 것"이라며 "생때같은 자식들 눈에 밟혀서 이렇게 꽃피는 계절이면 또 그새 생각나서 여러분들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느냐"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이어 "우리도 겨우 27년 만에 (5월18일이) 국가기념일이 된 것이니까. 그러고도 얼마나 많이 고생했습니까. 여러분들은 굳게 단합해 나가야만 해요. 내가 내 자식의 한을 풀어야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쳐야만 한다"고 위로했다.
자식 잃고 '길 위의 투사' 돼야 했던 어머니들
갑작스럽고 이해되지 않는 아이의 죽음은 부모에게 '과제'를 남긴다. 부모들은 끊임없이 생각한다. "왜 막지 못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했을까", "내가 무엇을 해야 했고, 이제라도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떤 엄마는 평범한 일상에서는 상상도 못 할 용기를 끌어내 권력 앞에 나서고, 어떤 아빠는 자신의 생업을 중단하고 "내 직업은 아들 원혼 풀어주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40여 년 전 5·18민주화운동으로 아들을 잃은 장상남씨도 그랬다. 5·18민주화운동 피해자 고(故) 박철씨의 어머니 장상남씨는 전남도청 앞에서 집회하다가 경찰에 끌려간 고등학교 2학년 아들의 구명운동을 벌이다 본인도 경찰에 구타당하는 등 자식을 위해 '투사'가 돼야만 했던 사연을 이태원 참사 유가족에게 들려줬다.
"아들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데모하고 다녔어. 도청 앞에 아들 있대서 '야 가자'고 했더니 '엄마, 너도나도 다 무서우면 누가 도청 앞을 지키겠어. 나 내일 갈 테니까 가셔' 그래서 '그럼 내일 와라'하고 갔는데 아침에 날이 새도 소식이 없어. 애가 잡혀갔다고 그래서 가보니까 손톱 발톱을 막 빼서 피가 줄줄 흘러. 밤에 비공식으로 면회를 해줘서 갔더니 막 피 뚝뚝 흐르면서 엄마 소리도 못하고 섰어. 애를 거꾸로 매달아 놓고 고춧가루 탄 물을 코에 주전자로 부으면 죽어버려. 죽으면 병원에 데려갔다가 또 살면 데려다 그래서. 세 번을 죽었다가 살아났거든요. 그리고 1년은 더 (감옥에) 살았어"
장 어머니는 감옥에 간 아들 대신 '데모(집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 아들 구명하러 다닌다고 전두환이 온 날 전두환이 차 앞으로 뛰어들었어. 내 아들 내놓으라고 뛰어들어서 잡혀 들어가서 쇠고랑 차고. 경찰서에 가서 주먹으로 (얼굴을) 막 때리고 맞아서 이(오른)쪽 귀는 고막이 터져버려서 없어. 요(왼)쪽은 들리는데 이제 87세거든요. 나이가 먹으니까 귀가 어두워져. 지금까지 살고 있어"
오월의 어머니들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유가족들은 새삼 30~40여년의 길고 힘겨운 싸움을 해온 어머니들의 말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 유가족은 "30년, 그때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이를 들은 오월어머니집 안성례 어머니는 "살아요. 가슴치고 울고 억장 무너지면 이게 병이 되면 안 된다"며 "애들이 (이태원에 당연히) 놀러 갈 수 있죠. 뭐 하러 놀러 갔냐고 탓하는 소리 하더라도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아프지 말고 내가 기어이 살아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해달라"고 당부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총격에 두 눈을 잃은 강해중 어머니는 이태원 참사 유가족 유진 아빠가 묻는 안부 인사에 "난 자식들이 많으니까 잘 지내요. 몇 남매 키웠어요?"라고 물었다.
"딸 하나였어요"
하나뿐인 딸을 보냈다는 유진 아빠의 말에 강 어머니는 "딸 하나? 오매…"라며 잠시 말을 잃었다. 곧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건강하시게"라고 겨우 입을 떼고는 유진 아빠의 손을 꼭 쥐고 한참을 위로했다.
종교·시민단체도 "사연 알기 전 오해 송구…진상규명 힘 보태겠다"
앞서 이날 오전 9시쯤 옛전남도청 별관에서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을 만난 옛 전남도청원형복원지킴이 추혜성 대표는 "(저도) 처음에는 이태원 사건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왜곡돼서 받아들였다"며 "광주에 계신 유가족분들을 한 번 만나 그 사연들을 다 알게 돼서 너무 가슴이 아팠고, 잠시나마 우리가 오해했던 부분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고백했다.추 대표는 "저희는 (1980년부터) 43년인데도 아직 발포자가 누구라든지 그런 게 안 나타나고 있다"며 "(전두환) 본인이 저기(사과) 하지도 않고 그냥 가버려서. 그런데 오직 진상만 밝히자는 생각으로 똘똘 뭉쳐야지 이게 조금이라도 밝혀진다. 서로 마음에 있는 모든 얘기들을 끌어내고 하나가 돼서 반드시 진상 규명을 이루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이어 "오늘 전두환 손자가 이미 광주에 도착을 해서 사죄한다고, (광주까지 오느라) 너무 지쳐서 오늘 하루 동안은 재우고 내일 찾아올 것 같다. 진심으로 본인들이 사죄하면 받아들일 수가 있다"며 "(이태원 참사 책임자들이) 자꾸 핑계 대는 게 사람을 더 분노하게 만들고 힘들게 한다. (여러분은) 우리 갈 길만 가겠다고 앞만 보고 가시면 뒤에서 저희도 그 길을 같이 따르겠다"며 연대의 뜻을 전했다.
오후 2시쯤에는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옥현진 시몬 대주교가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만나 위로를 건넸다.
옥 대주교는 "1980년 5월 전두환 정권 동안에 말도 못 하고 긴 세월 견뎌야만 했던 분들, 트라우마를 겪고 계신 분들 위로를 위해 매년 위문 잔치를 하고 있다"며 "늘 강조하는 게, 건강 하십쇼. 여러분이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입니다.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이 중요하다"며 격려했다.
"1980년 5월의 사건도 아직 다 규명 안됐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몫을 해내고 있습니다. 부모님들 특별히 건강하십쇼. 내가 살아있는 것이 진실규명의 살아있는 증인이라는 사명감으로 자기 건강 잘 보살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도울 수 있는 방법 지혜롭게 잘 찾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