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선(24·의정부시청)의 지난 겨울은 아름다웠다. 얼음 위에서 김민선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여성이었다. 지난해 베이징동계올림픽의 아쉬움을 떨치고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500m 세계 랭킹 1위를 차지했다.
신(新) 빙속 여제의 탄생이라 할 만했다. 김민선은 2022-2023시즌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스피드 스케이팅 월드컵에서 1~5차 대회까지 여자 500m 금메달을 휩쓸었다. '빙속 여제' 이상화(34)도 걸지 못했던 월드컵 1000m 은메달도 수확했다. ISU 4대륙선수권대회 2관왕과 2023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세계유니버시아드대회, 제104회 전국동계체전 3관왕은 덤이었다.
그런 김민선이 29일 서울 서초구에서 진행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화려했던 시즌을 마친 소회를 들려줬다. 김민선은 올 시즌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내면서도 다음 시즌에 대한 다부진 각오를 밝혔다. 올 시즌이 90점이었다면 다음 시즌 남은 10점을 채우겠다는 당찬 계획이다.
▲"新 빙속 여제? 아직 상화 언니만큼은 아니지만…"
지난해 2월 김민선은 베이징에서 굵은 눈물을 흘렸다. 메달을 목표로 가장 큰 무대인 베이징동계올림픽에 나섰지만 아쉽게 시상대에 서지 못했다. 37초60의 기록으로 전체 30명 중 최종 7위에 올랐다. 김민선은 4년 전 평창올림픽 당시 16위에서 순위를 대폭 끌어올려 톱10에 들었지만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김민선은 절치부심 올 시즌 얼음판을 평정했다. 지난해 3월 ISU 월드컵 파이널에서 동메달로 시동을 걸더니 11월 ISU 월드컵 1차 대회 여자 500m에서 37초553로 꿈에 그리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민선은 SNS에 "항상 꿈꾸던 금메달을 드디어! 행복해요"라고 감격적인 소감을 밝혔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2차, 3차 대회까지 월드컵을 휩쓸었다. 4차 대회에서는 36초96의 개인 최고 기록을 찍으며 정상에 올랐다. 특히 베이징올림픽에서 금, 은메달을 따냈던 선수들까지 제쳤다. 베이징 당시 은메달리스트 다카기 미호(일본)은 37초26, 금메달을 따냈던 에린 잭슨(미국)은 37초35에 머물렀다. 내친 김에 5차 월드컵까지 김민선의 금빛 질주는 이어졌다.
당연히 '신(新) 빙속 여제'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이 붙었다. 이에 대해 김민선은 "전에는 '제2의 이상화'라는 게 먼 목표처럼 느껴졌는데 이제 현실로 다가왔다고 느껴진다"면서 "아직 상화 언니처럼 완벽하게 같은 정도의 선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제 막 1등을 하기 시작했으니 그래도 많이 다가왔다고 생각한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만큼 책임감도 커졌다. 김민선은 "이전에는 빙속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무게감은 없었는데 이제는 조금 생긴 거 같다"면서 "부담스러운 위치가 아니었지만 좋은 성과를 내고 있고, 그에 대한 기대가 많아진 게 사실"이라고 했다. 기분 좋은 부담감이다.
지난해 베이징의 아픔이 큰 힘이 됐다. 김민선은 "지난해 베이징에서 좋은 경험을 많이 했다"면서 "올 시즌을 준비하면서 내게 잘 맞는 스케이트 훈련 방법을 찾았는데 더 일찍 찾았다면 베이징에서 더 좋은 결과가 있었겠지만 크게 후회가 남거나 하진 않았고 만족한 경기였다"고 돌아봤다.
▲"올림픽 金 잭슨, 어린 동생처럼 축하해줬지만 이제는 위상이 다르죠"
지난 시즌과 비교해서 무엇이 가장 달라졌을까. 김민선은 건강한 신체를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다. (물론 비결이 있었지만 끝내 밝하진 않았다.)
김민선은 "지난 시즌뿐만 아니라 3~4년 전으로 비교를 해야 할 것 같다"면서 "지난 시즌까지는 허리 부상 여파가 있어서 웨이트 훈련을 거의 하지 못했다"고 돌아봤다. 폭발적인 스퍼트를 해야 하는 종목에서 웨이트 훈련은 필수지만 부족했던 최근 시즌이었다는 것이다. 김민선은 "스쿼트나 데드 리프트에서 거의 무게를 두지 못하고 기본적인 것만 해야 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올 시즌을 앞두고는 정상적인 훈련을 소화할 수 있었다. 김민선은 "2~3년 전 시즌과 비교하면 기술적으로도 그렇지만 근력 운동 비중을 키웠다"면서 "그런 차이가 36초96의 기록으로 나오게 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더 세밀한 훈련 비법을 물었지만 단번에 거절을 당했다. 김민선은 "말로 설명드리기는 어렵다"면서 "특정 동작에서 몇 초의 차이로 달라진 점이 있지만 세부적인 훈련 방법은 대외비"라며 휘갑을 쳤다. 영업 비밀이라며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로 눙쳤다.
결국 엄청난 훈련의 성과라는 것이다. 김민선은 "사실 월드컵 1차 대회부터 너무 좋은 결과, 깜짝 놀랄 만한 결과가 나왔다"면서 "원래 시즌 2관왕이 목표였는데 이게 2, 3차를 넘어 연속해서 이어졌다"고 돌아봤다.
다른 선수들의 대우부터 달라졌다. 김민선은 "월드컵에서 우승을 하니 다른 선수들이 먼저 인사를 많이 하더라"면서 "위치가 달라졌고 말을 걸기가 편해졌다"고 웃음을 지었다.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김민선은 "내가 다른 선수들을 많이 축하해주는 입장이었다"고 돌아봤다.
올림픽 챔피언도 마찬가지였다. 김민선은 "원래 지난해 3월 월드컵 파이널에서 동메달을 땄을 때 1위 에린 잭슨과 2위 브리트니 보(미국)가 시상대에 올라가기 전 나를 나이 어린 동생 보듯 축하해주고 너무 좋아해줬던 기억이 선명했다. 전설적인 선수들이었다"면서 "그런데 올 시즌에는 내가 1위를 하고 잭슨이 2, 3위를 하는 상황이 이어지다 보니 느낌이 많이 다르더라"고 상전벽해의 심경을 들려줬다. 위상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올 시즌은 90점, 다음 시즌에는 나머지 10점 채워야죠"
하지만 더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가야 할 길이 멀다. 김민선은 "베이징올림픽 시즌이 75점이었다면 올 시즌은 90점"이라고 스스로 점수를 매겼다. 모두가 놀란 결과를 냈지만 10점을 채우지 못한 아쉬움도 있었던 까닭이다.
경이적인 질주를 이었던 김민선은 시즌 막판 주춤했다. 월드컵 전관왕을 노렸지만 6차 대회에서 38초대 기록으로 아깝게 금메달을 놓쳤고, ISU 스피드 스케이팅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0.02초 차이로 4위에 머물러 메달이 무산됐다. 커리어 하이 시즌을 치르면서 마지막에 힘이 달렸던 것.
이에 대해 김민선은 "사실 체력이 떨어진 게 일정 부분 맞다"고 인정했다. 김민선은 "어떤 분들은 '대회를 안 뛰면 안 되냐' 하기도 하셨지만 애초에 모든 대회에 출전하려 했고 너무 좋은 결과가 이어지다 보니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욕심도 났다"면서 "그러다 보니 시즌 후반 어쩔 수 없이 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좋은 교훈이 됐다. 김민선은 "코치님께서 '4, 5위에서 경기하는 것과 1위로 상대 견제를 받으면서 대회를 치르는 것은 체력적인 부담이 천양지차'라고 하시더라"면서 "올 시즌 막판 아쉬웠지만 충분히 잘했던 시즌이었다고 했다"고 귀띔했다. 이어 "이렇게 1위를 연속으로 차지한 시즌이 처음이어서 체력적 안배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면서 "다음 시즌은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준비를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2023-2024시즌은 김민선에게 어쩌면 힘겨울 수도 있다. 베이징올림픽에 맞춰 전력을 쏟아부었던 경쟁자들이 그 여파로 올 시즌 주춤했지만 다음 시즌부터 컨디션을 끌어올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잭슨은 올 시즌 여자 500m 랭킹 6위, 미호는 4위에 머물렀다.
하지만 김민선은 자신감이 넘친다. "실제로 다음 시즌에 경쟁이 치열할 거라 생각한다"면서 김민선은 "그러나 올 시즌 좋은 결과를 냈고 그 기세를 이어 시즌을 준비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다른 선수들이 나를 완벽하게 라이벌로 생각하는데 견제한다는 것은 그럴 만한 실력이 있는 것"이라면서 여제의 자리를 부담보다는 긍정적으로 여기겠다는 마음가짐을 드러냈다.
김민선이 바라보는 최후의 목표는 오는 2026년 밀라노-코르티나동계올림픽이다. 아직 3년이 남았지만 김민선은 "3번째인 밀라노올림픽이 최종 목표"라면서 "이전 대회에서 아쉬움이 남았지만 완벽한 레이스를 통해서 후회 없이 아쉬운 거 없이 좋은 결과로 보여줄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를 위해 김민선은 "외국 선수들과 비교해 신장과 골격이 달라 체격적으로 밀린다"면서 "이를 드라마틱하게 바꿀 수는 없지만 내 몸에서 최대의 근력을 기르도록 보완해 외국 선수들에 뒤처지지 않도록 경쟁하겠다"고 입을 앙다물었다.
지난 겨울 얼음판에서 세계를 통틀어 가장 빨랐던 여성 김민선. 새롭게 등극한 빙속 여제가 다음 시즌은 물론 밀라노까지 쾌속 질주를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