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EN:]가부장적 공간을 깨부수다…하이디 부허 회고전

하이디 부허 공간은 피막, 피부 전시 전경, 2023, 아트선재센터, CJY ART STUDIO 제공
스위스의 아방가르드 예술가 하이디 부허(1926~1993)의 아시아 첫 회고전 '하이디 부허: 공간은 피막, 피부'전이 28일부터 6월 25일까지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다. 조각과 설치, 드로잉, 실크 콜라주, 영상, 다큐멘터리 등 130여 점을 아우른다.

하이디 부허는 조각을 기반으로 드로잉,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1970~80년대 페미니즘 조형을 구축해온 여성 작가다. 한창 활동할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여성주의와 젠더 연구가 활발해진 2000년대 이후 재평가됐다. 사후 2004년 스위스 취리히의 미그로스현대미술관의 회고전을 시작으로 2013년 파리 스위스 문화원,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2021년 독일 뮌헨의 하우스데어쿤스트 회고전을 가졌다.

작가의 아들인 메이요 부허는 27일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과거 유럽은 쇼비니즘과 남성주의적 시선에 빠져 있었지만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고 앞으로 계속 바뀔 것이다. 2000년대 이후 하이디 부허의 작품이 재발견된 건 여러분 덕분"이라고 말했다.

하이디 부허. 아트선재센터 제공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해방과 변신이다. 작가의 아들인 인디고 부허는 "(어머니인) 하이디 부허는 가부장적 환경과 상업적인 예술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려 했고 변신을 동기 부여 삼아 작업했다"고 말했다

1971년이 되어서야 여성 참정권이 인정됐을 만큼 가부장적이었던 스위스에서 나고 자란 작가는 여성 예술가로서 개인과 사회의 가부장적 구조에 저항하며 해방을 시도했다.

전시장 1층에서는 스키닝(skinning) 기법을 통해 가부장적 공간에 대해 조각적으로 개입한 작품을 볼 수 있다. 스키닝은 공간 벽에 부레풀을 거즈와 함께 바르고 액상 라텍스를 덮어 말린 뒤 벗겨내는 기법이다.

스키닝 시리즈는 아버지의 서재, 조상들이 대대로 살던 집의 마룻바닥, 여성 혐오에 기반한 질병인 '히스테리아' 전문 정신과 의사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 등 가부장적 위계성이 내재된 공간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라텍스와 자개 안료를 이용해 침대, 여성 속옷, 드레스 등 여성의 시간과 기억을 콜라주하고 부조로 제작한 소프트 오브젝트 시리즈도 눈길을 끈다.

잠자리의 욕망 (의상), 1976,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제공
전시장 2층은 '잠자리의 욕망'(1976) 의상을 입은 작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허물을 벗고 날아가는 잠자리는 위계적인 사회에서 해방되기를 꿈꾸는 작가의 이상을 담고 있다.

특히 입고 움직이는 조각 '바디쉘'(1972)과 '바디랩핑'(1972) 시리즈는 모더니즘 조각사의 개임 체인저로 평가받는다. 부드러운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져 '조각은 단단하고 고정돼 있다'는 전통적 개념에 반기를 든다. 관람객은 이번 전시를 위해 재제작한 '바디랩핑'을 직접 입어보고 촬영할 수 있다.

작가의 생애 마지막 작업은 물에 대한 탐구였다. '오늘 물은 항아리 밖으로 흘러나온다'에서 보듯 작가는 물을 통해 해방과 영원을 사유했다.

인디고, 메이요와 함께 몸을 감싼 하이디 부허›, 1972,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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