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되짚어보니 성공 요인이 분명하게 보였다. '고교처세왕' '오 나의 귀신님' '역도요정 김복주' '아는 와이프' '한 번 다녀왔습니다' 등 로코에서는 흥행불패 '일타' 작가나 다름없는 양희승 작가가 집필을 맡았다. 후반에 '로맨스릴러'(로맨스+스릴러)에 집중하다 '쇠구슬 스캔들'이라는 불평이 나오긴 했지만 시청률은 끝까지 상승세를 그렸다.
예민하면서도 병약한, 엘리트 남자 주인공 전문가 정경호는 그야말로 딱 맞는 옷을 입었다. 어떻게 보면 '찌질'하게 느껴질 수 있는 최치열 캐릭터를 성공 신화 속, 알고 보면 인간적 매력이 가득한 일타 강사로 완벽하게 구현했다. 각 배우의 능력치와 별개로 전도연·정경호 조합에 대한 궁금증 역시 완전히 해소됐다. 정경호는 선배를 존경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행선'이 된 전도연의 감정과 생각, 한 인간으로서의 배우 전도연을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제 데뷔 20주년. 정경호는 굳이 뒤돌아보지 않는다. 20대도, 30대도 치열했지만 40대가 더 중요하다는 그에게서 굳은 심지가 엿보였다. 연기와 현장을 즐기고, 온전히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몰입하는 것. 굳이 무언가를 의도하지 않아도 자신이 나아갈 한 단계, 단계에 충실한 것. 정경호의 가장 큰 무기는 그런 일관성과 항상심이다.
다음은 정경호와의 인터뷰 일문일답.
Q 방영 내내 뜨거운 인기였다. 이런 결과를 예상했는지 궁금하다
A 유별나게 재밌다면서 연락이 많이 왔던 작품이었다.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오랜만에 가족적이고 달달한 로맨스의 시작을 했던 작품이었다. 사실 굉장히 특별한 내용은 아니고,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였다. 다만 일타 강사라는 새로운 설정과 반찬 가게 사장과의 로맨스가 신선했던 거 같다. 또 각 캐릭터들이 너무 살아 있어서 좀 더 사랑을 받았지 않나 싶다. 너무 감사할 뿐이다. 이 정도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원래 무슨 작품이든 시작할 때는 다 잘될 것 같은, 희망적인 기분이다. (웃음)
Q 연기력으로 정평난 배우 전도연과 함께 호흡을 맞춘 소감도 남다를 것 같다
A 감히 제가 선택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고 그냥 선배님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은 기회였다. 누구나 꿈꾸는 작업이었고, 선배님은 모르시겠지만 저는 촬영할 때 투샷이 잡히면 감독님 옆에서 모니터를 한번씩 돌려보고 그랬다. 꿈 같다는 생각을 했다. 되게 존경해 왔고, 좋아했던 사람과 같이 연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그런 연속이었다. 촬영 시작부터 끝까지 7개월 동안 매일 좋았다.
A 제가 20년 동안 연기 생활을 해오면서 너무 빠른 변화, 많아진 OTT나 장르 이런 것에 대해 그 흐름을 굉장히 잘 맞춰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배님과 촬영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감성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느꼈다. 농담 삼아 난 정체 되어 있는 거라고 말씀하셔도 그런 게 아니라 누구나 가슴 속에 기억되고 울림이 있는 웃음소리와 호흡, 이런 것들이 굉장히 큰 강점이지 않을까 싶었다. 선배님 연기를 보면서 감히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속으론 상황이 그게 아닌 거 같은데 억지로 표현할 때가 있을 수도 있지 않나. 그런데 어느 순간 진짜 행선이가 되어 계시더라.
Q 촬영은 힘들지 않았나. 이전에도 멜로 연기를 적지 않게 했는데 이번에 정경호에게 '입덕했다'는 사람들이 꽤 많더라. 병약미(美) 남자 주인공의 신기원을 열었다는 평가도 있는데
A 이런 말이 좀 그렇지만 진짜로 많은 노력은 하지 않았던 거 같다. 감독님과 작가님이 너무 재미난 놀이판을 만들어주셨고, 특히 현장에서 너무 편하게 해주셨다. 전도연 선배님도 계셨고…. 판서 이외에는 스트레스를 받은 게 없다. (웃음) 병약미 관련해서는 최치열 캐릭터가 직업적으로는 최고지만 밥도 못 먹고, 집에 혼자 있고, 이런 모습들이 많이 보여졌다. 감독님, 작가님과 함께 좀 더 인간적인 모습이 무엇인지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제가 잘할 수 있는 '하찮미'를 좀 많이 첨가를 하면 더 친숙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최대한 '정경호스러움'을 많이 살렸던 거 같다. 넘어지는 장면이 많았는데 실제로 그 정도는 아니고, 한 중간 수준이다. (웃음) 또 흐름도 그렇지만 운명적인 만남에 대한 이끌림을 잘 표현하려고 했다. 도시락을 먹으면서 눈물을 흘릴 때도 포인트를 줬다.
Q '일타 강사'라는 직업 역시 표현하기 쉽지 않았을텐데 디테일을 잘 살렸다는 칭찬이 많았다. 실제로 어떻게 준비를 했는지 궁금하다. 최치열만의 루트 기호 등이 인상적이었다
A 그런 세계가 있는 줄도 몰랐고, 수학도 '1도' 몰랐다. 실제로 일타 강사님들의 강의를 직접 들어보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눠보고 그랬다. 제가 강의하는 부분이 12문제 정도 나왔는데 실제로 수학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하진 않았고, 외우는 게 가장 어려웠다. 그건 사실 어떻게든 하겠는데 판서가 정말 어려웠다. 강사님이 쓰시면 제가 따라 쓰는데 어깨가 장난이 아니게 당겼다. 드라마 내용상 필요해서 루트나 리미트 기호 등은 처음부터 특별하게 쓸 수 있는 방법을 정해 놓고 갔다. 다 설계가 된 거다.
A 그런 생각을 했고, 그들만의 삶이 있더라. 늘 가십의 대상이고, 우리가 방송이나 영화에 대한 후기를 찾아 보듯이 선생님들도 수업이 끝나면 후기를 찾아 본다. 여기서 말이 빨랐다, 여기서 어미가 왜 내려가느냐, 오늘 기분이 나쁘냐,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똑같은 삶을 살고 있더라. 개인 시간이 주어져도 문제 연구하고, 돈이 쌓여도 사실상 휴가도 없는 삶을 살고 있더라. 뭐가 행복하냐고 물으면 강의할 때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일 때라고 한다. 자신이 문제를 만들고, 그 풀이 과정도 본인이 만드니까…. 저희도 (대중의) 사랑을 받으면 너무 좋고 만족해 하는 지점과 비슷했다.
Q 후반으로 갈수록 로맨스보다 '쇠구슬 사건'에 너무 치중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A 저도 개인적으로 행선이랑 연애가 좀 짧지 않나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연애가 하기 전까지 재미있지, 하고 나면 또 그렇지 않다. 저는 충분히 로맨스가 있었다고 보고, 또 지동희(신재하 분) 실장이 왜 그랬는지 설명해주는 부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Q 늘 작품마다 '재발견'이란 이야기를 듣는 배우 중 한 사람인 것 같은데
A 너무 감사한 이야기다. 20년 동안 쉬지 않고, 하나씩 열심히 하고 있는데 재발견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더 기분이 좋다. 더 다른, 좋은 모습을 많이 보여 드려야겠다는 마음가짐도 다시 생긴다.
Q 최수영의 '일타 스캔들' 관련 피드백이 궁금하다. 또 본인도 실제로 최치열 같은 '사랑꾼'인지
A 너무 재미있게 봤다고 했다. 그분은 저를 제일 잘 아니까 '오빠 답다'고 하더라. 실제로 그렇게 달달한 편은 아니고 평소와 비슷하다. 사실 일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 편이다. 남들 연기는 이야기를 해도, 서로에 대해선 이야기 안 한다. 엊그제도 영화 '바빌론'을 보고 밤새 이야기했는데 '일타 스캔들' 이야기는 1분도 안 했다. (웃음)
A 저는 엊그제라도 별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일타 스캔들' 시작 전으로 돌아가서 잘할 수 있냐고 해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냥 저는 작품을 할 때, 최선을 다해서 후회를 최대한 남기지 않으려는 편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인데 작품을 많이 해서 감사한 시간들이다. 전도연 선배님, 박성웅 형, 신원호 감독님 등과 또 언제 작품을 하겠나. 그럴 거라고 생각도 못했지만 버티고 있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나 싶다.
Q 까칠한 엘리트 주인공 역할을 많이 맡아왔다. 스스로 이미지 변신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있나
A 근 10년 동안 예민하고, 까칠하고, 섭식장애가 있거나 에이즈 환자 등 이런 역할들을 연속적으로 해왔다. 그래서 내게도 변화의 시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을 했었다. 이 작품도 까칠하지만 따뜻한 캐릭터였다. 우연치 않게 TV에서 최치열을 보는 순간,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리즈의) 김준환과 최치열의 예민함이 달랐다. 전작들에서 했던 다른 역할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나름 단단해졌고, 제가 해왔던 시간들이 틀리지 않았고,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변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도연 선배님도 30년 넘게 연기하면서 얼마나 많은 감정적 변화가 있었겠나. 제 지난 시간들이 나쁘지만은 않았구나 싶었고, 다음 작품에서 또 이런 역할을 맡아도 조금은 스스로 변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Q 이미지 변신을 하는 대본이 들어온다면
A 제발 그런 대본이 들어왔으면 좋겠다. (웃음)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쉼표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작품을 쉬지 않고 하니까 다양한 역할을 맡으면서 정경호라는 사람이 변하고 성장했다. 그런데 이건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가진 게 많고, 단단한 상태에서 다양한 역할을 해야지, 쉬지 않고 그렇게 하다 보면 계속 제자리일 것 같다. 41살이라는 나이가 적지도, 많지도 않고 중간인 위치인데 지난 20년보다 이 시기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Q '정경호'하면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은지
A 20대에는 약간 제 멋에 해왔던 거 같고, 30대에는 내가 조금 부진하면 이 일을 못하겠다는 생각에 책임감 있게 연기를 해왔다. 40대는 기대가 되는 사람, 배우로 기억 되고 싶다. 아직 한참 멀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