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말 일본의 공격 때 상위 타순이 돌아오자 3번 지명타자에 이름을 올려놓은 오타니는 혹시 모를 자신의 타석에 대비해 불펜에서 덕아웃으로 달려왔다.
진풍경이었다. 투수와 타자를 병행하는 이도류 그리고 불펜 등판을 자처할 정도로 우승에 대한 오타니의 강한 열망이 만들어낸 장면이었다. 야구 종목에서 다시 보기 힘든 장면으로 그가 뛰어가는 모습이 집중 조명될 정도였다.
오타니는 2018년 메이저리그 진출 당시부터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일본프로야구에서 이도류로 성공을 거둔 오타니가 과연 미국 무대에서도 투수와 타자를 병행할 수 있을지 관심을 모았다. 기대만큼 의문부호도 많았다.
하지만 오타니는 성공했다. 2021시즌 타자로서 46홈런을 터뜨렸고 투수로서 9승2패 평균자책점 3.18을 기록했다. 오타니는 그해 아메리칸리그 MVP를 차지했다.
2022시즌에는 더욱 놀라운 기록을 썼다. 타석에서 34홈런을 때린 오타니는 마운드에서 15승9패 평균자책점 2.33으로 활약했고 규정이닝(166이닝)을 채우는 괴력을 발휘했다. 최정상급 타자와 에이스급 투수의 기록을 한꺼번에 남긴 것이다.
오타니의 상품가치는 하늘을 찌른다. 그가 자유계약선수(FA)가 됐을 때 총액 5억 달러 규모의 계약이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주를 이룬다. LA 에인절스의 동료이자 현역 최고의 스타 마이크 트라웃의 총액 4억2650만 달러 계약 규모를 뛰어넘을 것이 유력하다.
그의 가치는 WBC 무대에서도 빛을 발했다.
오타니는 일본 야구 대표팀에서 붙박이 3번 지명타자로 뛰었다. 1라운드 B조 중국전과 8강전 그리고 결승전에서는 투수로도 활약했다. 오타니가 가는 곳마다 야구장에는 구름관중이 몰려들었다. 오타니와 관련한 WBC 상품은 불티나게 팔렸다.
오타니의 그라운드밖 행동도 주목받았다. 1라운드에서 눈부신 투혼을 발휘한 야구 변방 체코를 존중하는 오타니의 자세에 찬사가 쏟아졌다. 미국 입국 때 '리스펙트'의 차원에서 체코 대표팀의 모자를 착용했고 이후 체코 모자의 판매량이 급증하기도 했다.
오타니의 진가가 가장 크게 발휘된 곳은 역시나 그라운드였다.
오타니는 일본이 미국에 3-2로 앞선 9회초 마무리 투수로 등판했다.
오타니의 등판 자체가 만화같은 일이었다. 이 대회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오타니가 팀의 우승을 위해 마지막 순간을 책임지려고 한 것이다. 오타니는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단 한 번도 불펜 등판을 해본 적이 없다.
게다가 모두가 보고 싶었던 '오타니 vs 트라웃'의 대결이 성사됐다. LA 에인절스에서 한솥밥을 먹는 두 야구 천재의 투타 맞대결이 펼쳐진 것이다.
어쩌면 WBC 주최 측은 그 순간을 위해 이번 대회를 준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모두가 기다린 '역대급' 투타 맞대결이었다.
오타니는 9회초 2사에서 트라웃을 만났다. 운명의 대결.
초구는 88마일 슬라이더 볼, 2구는 한복판 100마일 패스트볼로 트라웃의 방망이를 헛돌렸다. 3구는 100마일 패스트볼 바깥쪽 볼, 4구는 다시 한복판 100마일 패스트볼로 헛스윙을 끌어냈다. 5구는 바깥으로 크게 빠진 102마일 패스트볼 그리고 풀카운트에서 던진 87마일 슬라이더에 트라웃이 헛스윙을 하면서 대결은 끝났다.
일본은 3-2로 승리했고 1,2회 대회에 이어 통산 세 번째 WBC 우승을 차지했다.
제5회 WBC 주인공이 연출한 완벽한 엔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