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책임자였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출신 이인규 변호사가 출간한 책을 둘러싸고 후폭풍이 거세다.
18일 법조계에 따르면 이 변호사는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누가 노무현을 죽였나(조갑제닷컴·532쪽)'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의 뇌물 혐의가 모두 사실이라는 취지로 주장했다. 책 내용이 알려지면서 친노계(親노무현계)를 중심으로 거센 반발이 터져 나왔다.
이인규 "뇌물 혐의 유죄 받아낼 충분한 '물적' 증거 확보"
이 변호사는 책에서 권양숙 여사가 고(故) 박연차 회장에게 피아제 남녀 시계 세트 2개(시가 2억550만원)를 받은 사실은 다툼이 없고, 재임 중이었던 2006년 9월 노 전 대통령에게 뇌물로 전달됐음이 상당하다고 주장했다.또한 2007년 6월 29일 권 여사가 청와대에서 정상문 당시 총무비서관을 통해 박 회장에게 100만달러, 그해 9월 22일 추가로 40만달러를 받은 사실도 인정된다고 했다.
이 변호사는 박 회장의 진술 등을 종합하면 권 여사와 노 전 대통령이 공모했고, 이는 아들 건호씨 미국 주택 구입 자금 명목이라고 책에 적었다.
2008년 2월 22일에는 건호씨와 조카사위 연철호씨가 박 회장에게서 500만달러를 받았고 건호씨 등이 사용한 것은 '다툼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돈은 박 회장이 노 전 대통령에게 주기로 약속한 환경재단 출연금 50억원을 500만 달러로 쳐서 건호씨 등에게 사업자금 명목으로 준 뇌물이라고 주장했다.
대통령 특수활동비 12억5천만원을 횡령하고 국고를 손실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정 전 비서관은 단독범행이라고 주장하지만, 노 전 대통령과 공모한 범죄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도 했다.
이 변호사는 당시 검찰은 이런 혐의 등으로 노 전 대통령을 기소해 유죄를 받아낼 충분한 '물적' 증거를 확보했지만, 노 전 대통령이 사망해 '공소권 없음' 처리된 것이라고 했다.
전해철·노무현재단, 이인규 회고록 '왜곡·폄훼'…강력 반발
이같은 내용이 알려지자 노무현재단은 전날 보도자료를 통해 "이인규씨의 책 내용은 확정된 사실이 아닌 일방적 주장에 불과하다"며 "수사 기밀에 해당하는 내용을 검증된 사실인 양 공표하는 것은 당시 수사 책임자로서의 공적 책임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까지 저버린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그러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이러한 사실들을 재임 중에 전혀 몰랐으며 일체 관여한 바가 없음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밝힌다"고 강조했다.
노 전 대통령 검찰 수사 당시 변호인으로 대검 중수부 소환 조사 당시 입회하기도 했던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강하게 반발했다.
전 의원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에서 "이인규 검사는 거만하고 교만한 태도로 일관했었다"며 "검찰은 일상적인 피의사실 공표와 언론을 활용한 마녀사냥식 망신 주기로 정치검찰 행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고 밝혔다.
또한 "이인규 전 검사가 회고록을 통해 주장한 내용은 사실의 적시라기보다는 자신의 관점과 시각에서 두 분 대통령을 왜곡되게 묘사하고 폄훼한 것으로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며 "그로 인해 대통령님께서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으셨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도 SNS를 통해 "이번 책은 고인과 유가족을 두 번 죽이는 일입니다. 노 전 대통령이 권여사의 자금 수수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를 밝혀라. 그렇지 못하면 님은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라고 경고했다.
"수사기록 공개하는 길밖에 없다"…공개 가능할까?
이처럼 양측의 주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면서 검찰이 영구 보존한 당시 수사기록에 이목이 쏠린다. 양측의 진실 공방에 종지부를 찍는 동시에 노 전 대통령의 뇌물 수수 의혹을 명쾌히 밝힐 수 있게끔 당시 '밀봉'된 수사기록을 공개할 수 있는지 관심이 모아진다.
해당 수사기록은 2009년 6월 12일 수사 결과 발표 당시 영구보존 기록으로 지정됐다고 알려졌다. 이 변호사는 노 전 대통령 검찰 조사 장면을 녹화한 영상기록물 CD를 수사 기록 끝에 첨부했다고 밝혔다.
검찰보존사무규칙(법무부령)에 따르면 불기소사건 기록은 피의자를 비롯해 고소인·고발인, 피해자, 참고인 등 사건관계인이 신청해야 열람, 즉 공개가 가능하다.
다만 신청으로 모든 열람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규칙 제22조는 수사서류 등의 열람과 등사 제한 규정을 두고 있다. 예를 들어 다른 법률 또는 법률의 위임에 따른 명령으로 비밀이나 비공개 사항으로 규정하고 있는 경우 등에는 공개를 제한할 수 있다.
또한 국가안전보장이나 국방·통일·외교에 관한 사항으로 공개했을 때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을 때도 제한되고 사건관계인의 명예나 사생활의 비밀, 생명·신체, 재산 보호에도 현저한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있을 때도 제한된다.
"밀실 조서일 뿐"…수사기록 공개해도 논란 종식 미지수
당시 수사기록이 여러 요건을 갖춰 공개가 이뤄지더라도 논란이 종식될지는 미지수다.이 변호사는 책 말미에 "문재인 전 대통령(당시 비서실장)이 무슨 근거로 '수사기록이 부실하다'고 단정하는지 어이가 없다"며 "영구보존 중인 (사건) 기록은 훨씬 더 구체적이고 적나라하다. 이것으로 성에 안 찬다면, 수사기록을 공개하는 길밖에 없다"고 밝혔다. 자신의 책 출간을 둘러싼 파장을 어느 정도 예상한 것으로 읽힌다.
반면 노무현재단은 반박 입장에서 "수사기록은 검찰이 관련자들을 밀실에서 조사한 조서일 뿐"이라며 "공개된 법정에서 변호인의 반대신문 등을 통해 진실성이 검증된 문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물적 증거들도 적법절차를 준수해 수집했는지 여부를 살펴보지 않아서 증거능력이 없다"며 "사실인지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수사기록의 일부를 꺼내 고인과 유가족을 모욕하는 것은 또 한 번의 정치공작으로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박혁수 부장검사)는 이른바 '논두렁 시계' 보도 배후에 국가정보원이 있다고 주장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된 이 변호사에 대해 지난해 10월 28일 무혐의 처분했다.
'논두렁 시계' 논란은 2009년 4월 KBS가 명품 시계 뇌물 의혹을 최초 보도하고, 다음달 SBS가 노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에서 '집사람(권양숙 여사)이 봉하마을 논두렁에 (시계를) 내다 버렸다'는 진술을 했다고 보도하면서 불거졌다.
이 변호사는 이 보도의 유력한 배후로 지목됐고, 그간 여러 언론 인터뷰는 물론 이번 회고록에서 실제 배후는 국정원이라고 주장했다. 이 변호사는 KBS와 국정원 관계자로부터 받은 확인서를 검찰에 제출해 혐의를 벗은 것으로 파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