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센 지는 손에 뭘 쥐고 있는가 보라 안 했습니까?"
빽도 족보도 없이 뚝심 하나로 20년을 버틴 국회의원 후보 전해웅은 공천 확정을 하루 앞두고 부산의 권력 실세 권순태(이성민)로부터 버려져 공천에서 탈락한다. 설상가상 선거 자금을 대준 김필도(김무열)의 압박으로 궁지에 몰린 해웅은 해운대구 재개발 계획이 담긴 대외비 문서를 손에 넣어 필도를 회유하고, 순태를 무너트릴 판을 짠다.
영화 '대외비'(감독 이원태)는 1992년 부산, 만년 국회의원 후보 해웅과 정치판의 숨은 실세 순태, 행동파 조폭 필도가 대한민국을 뒤흔들 비밀문서를 손에 쥐고 판을 뒤집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쟁탈전을 그린 범죄드라마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 미친 존재감을 과시한 조직폭력배 김판호, '끝까지 간다'의 악질 끝판왕 박창민, '명량'의 일본 장수 와키자카, tvN 드라마 '시그널'의 이재한 형사 등 매 작품 다양한 캐릭터를 선보인 배우 조진웅이 '정치판'이라는 진흙탕 속에서 점차 타락해가는 인물을 그려냈다. 안 그런 척 하지만 떨리는 눈동자, 미약하게 진동하는 눈꼬리, 압도적인 상대 앞에서 속절 없이 흘러내리는 땀방울 등 미세한 변화까지 그려낸 전해웅은 조진웅이 어떤 배우인지를 증명했다.
'대외비'의 개봉을 앞둔 지난달,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조진웅은 "고민이 많았던 작업"이라면서 동시에 "배우로서는 신명 났던 작업"이었다고 표현했다.
전해웅이 조진웅에게 던진 고민과 질문
이원태 감독이 "감정의 진폭이 큰 캐릭터를 소화할 배우로 '조진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고 말한 것처럼, 조진웅은 한 인간의 다양한 면모는 물론 점차 나락으로 추락해 가는 모습까지 시시각각 섬세하게 그려냈다.
조진웅은 '대외비'의 시나리오를 받아본 후 "한 번 진하게 작업해볼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며 "어려운 걸 알지만, 죽을 거 같이 힘든 걸 알지만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전해웅'이란 캐릭터는 그에게 고민에 고민을 안겼다.
조진웅은 자신이 연기한 전해웅을 두고 "그럴 거 같은 인물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는 "저렇게까진 아닌 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렇게 되는? 그게 좀 슬프긴 하더라"며 "권순태와 같은 권력 실세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아마 해웅은 올바르고 정의감 있게 살지 않았을까 싶다. 오히려 그런 걸 맛보면서 진짜로 빠져들다가 타락했다"고 했다.
빚에 시달리지만 성공한 정치인이 되려는 욕망을 품고 있는 해웅은 극이 전개될수록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권력에 사로잡혀 악으로 기우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인물이기에 조진웅의 내면에도 조금 더 잔혹하게 그려내고 싶다는 배우로서의 욕망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걸 잘 드러내야 보는 분들이 '나는 저렇게 까진 하지 말아야지' '아무리 그런 상황이 되더라도 큰 욕심 말고 적당하게 살아야지' 그런 생각도 할 수 있거든요. 결국 이 영화는 '선하다' '악하다'를 떠나서 이정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여기로 가면 권력을 얻지만 지옥에 가. 여기로 가면 거지로 사는데 천당에 가' 이런 느낌이라, 그런 선택의 기로에서 한 번쯤 고민해봐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조진웅 역시 당시 후배 배우, 스태프 등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너 같으면 이럴 때 어떻게 할 것 같아?'라는 질문을 많이 던졌다. 만약 현실의 조진웅에게 이러한 질문이 들어온다면, 무언가와 끊임없이 타협할 것을 종용하는 존재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주저 없이 "모든 것"이라고 말했다.
혈연을 비롯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이걸 포기하라면 할 것이다. 식구들을 보고 내가 뭘 포기 못 하겠나"라는 게 조진웅의 답이었다.
수많은 고민과 질문을 거쳐 완성한 전해웅이다. 그렇기에 조진웅은 "나도 작업하면서도 굉장히 많이 고민했는데, 하고 나서는 정말 신명났구나 했다. 배우로서 굉장히 재밌었다. 이런 연기를 할 때 정말 신난다"고 웃으며 말했다.
20대의 열정, 그 빈자리를 채워주는 '가족'
'대외비'에서 조진웅이 연기한 전해웅과 함께 분위기를 압도하는 아우라를 과시하는 인물은 바로 이성민이 연기한 권순태다. 정치판을 뒤흔드는 숨겨진 권력 실세 권순태를 두고 이원태 감독은 "이성민이 대사할 때 절뚝거리는 다리를 매만지는데, 콘티에도 없는 연기였다. 이 작은 디테일이 순태를 더 무서운 악인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영화 '공작' 등에서 이성민과 호흡을 맞췄던 조진웅은 "이성민 선배와 작업을 많이 해봐서인지 별 이야기를 안 한다. 그럴 필요가 별로 없다"며 "엇나갈 거 같으면 선배님이 딱 잡아주니까 난 그냥 놀면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극 중에서 해웅과 순태가 계속해서 거래하는 장면을 연기하며 배우로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말했다. 조진웅은 "처음에는 '나 이거 갖고 왔으니 잘하자' 이런 식이라면 점점 그게 커지면서 거래가 망쳐지면 죽는다는 긴장감이 있었다"며 "이걸 어떻게 재현해낼지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배우들과의 협연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2004년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로 데뷔한 조진웅은 어느덧 20주년을 앞둔 베테랑 배우가 됐다. 스무 살 연극무대에 올라 배우 활동을 시작했던 조진웅은 당시 '열정' 하나로 무대를, 길을 누비며 지금에 이르렀다. 그때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의 자신을 만든 자양분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다시 돌아갈 수 있냐는 질문에는 손사래를 쳤다. 당시만큼의 열정이 지금의 자신에게는 없는 것 같다는 이유에서다.
대신 20대의 열정을 대신해 현재의 조진웅을 채워주는 건 '가족'이다. 그는 "호적이나 가족관계증명서에 있는 사람만이 식구라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먹여 살려야 할 사람들을 잘 끌고 가야 할 거 아닌가"라고 말했다.
'대외비'로 함께한 사람들 역시 그가 말한 가족의 일부일 것이다. 그렇기에 조진웅은 "내가 사는 것도 고민이 많고 힘든데 영화를 보면서 또 이런 고민을 해야 하냐고 하실 수 있는데, 그렇게 자기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없다"며 '대외비'가 진짜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전했다.
"다른 범죄드라마는 상황을 주고 해결한다든지, 정의가 승리한다든지, 결국 해결되는 지점이 생기는데 '대외비'는 그렇지 않아요. 그냥 나빠질 대로 나빠지는데, 옳지 않을 대로 옳지 않아지는데 그대로 가요. 이해하기엔 너무 옳지 않죠. '저들에게 옳고 그름이 있을까?' '나는 벌써 저런 사람이지 않을까?' 등의 질문이 도출되는 데까지가 굉장히 중요한 과정이라 생각해요. 자기가 그렇게 되어져 있는 상황인지도 모르고 살 수 있는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