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후 4시,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올림픽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20주년 콘서트 '더 보아 : 뮤지컬리티'(THE BoA : Musicality)를 3년이나 늦게 열게 된 보아는 첫 곡 '브리드'(Breathe)부터 오프닝으로만 7곡을 연속으로 불렀다.
첫인사 때 들은 목소리는 본인 말대로 그리 좋지 않았다. 잠긴 듯했고 종종 떨렸다. 20년 넘게 노래하고 춤춘, 실력 면에서는 따로 말할 필요가 없는 프로라는 걸 알면서도, 심상치 않은 목 상태에 의심과 염려가 들었다. 아쉽게도 이날 보아의 라이브는 '100% 컨디션'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도 높은 연습 속에서 꾸준히 키워온 기본기가 나쁜 컨디션을 어느 정도는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공연이었다.
이날 세 번째로 부른 '카피 앤 페이스트'(Copy & Paste)의 가사처럼 '이유 있는 자부심'이 공연을 에워싸고 있었다. 우선, 공연 개최를 알리면서 포스터에 세트 리스트 전체를 담은 것이 첫 번째다. 어떤 노래를 부르는지는 팬들의 기대가 쏠리는 핵심 정보다. 그런데 보아는 처음부터 자신이 가진 패를 숨김 없이 공개했다. 자신감 없이는 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베이스 김성수, 키보드 신예찬·조성태, 기타 이문기, 퍼커션 이윤혁, 드럼&밴드 마스터 송국정으로 이루어진 6인조 밴드 연주는 곡에 착 달라붙어 듣는 재미를 끌어올렸다. 일렉 기타 소리와 드럼 비트가 심장을 쿵쿵 뛰게 한 '허리케인 비너스'(Hurricane Venus)를 비롯해 '마이 네임'(My Woman) '공중정원'(Garden In The Air)에서 밴드 연주가 인상 깊었다.
'공중정원'부터 '내가 돌아'(NEGA DOLA) '발렌티'(VALENTI) '스파크' '원 샷, 투 샷'(ONE SHOT, TOW SHOT)까지. 따로 떼어놓고 봤을 땐 상당히 다른 매력을 지녔다고 생각한 곡을 이질감 없이 한 구간 안에 담아내는 솜씨에도 새삼 감탄했다.
한편으로는 이틀 동안 공연을 해낸 것 자체가 '이유 있는 자부심'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목과 몸이 최상의 상태라고 해도 댄스곡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이번 세트 리스트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공연 중후반부 발라드 구간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곡에 안무가 있었고, 이따금 음 처리가 완벽하지 못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열창했다.
평소보다 좀 더 분위기 있고 감미롭게 편곡된 '키스 마이 립스'(Kiss My Lips) 당시, 보아는 잠시 힘겨운 듯 긁는 듯한 소리를 노출했지만 이내 힘차고 탄탄한 가성으로 고음을 뽑아냈다. 가사에 맞춰 손 키스를 하는 여유도 잊지 않았다. 짙은 파란색의 커다란 부채를 든 댄서들과 한 몸처럼 만들어낸 퍼포먼스는 '키스 마이 립스'의 정수(精髓)였다.
"진짜 이번 감기가 떨어지지 않는 거다. 제가 한 달 전에 걸렸는데 나을 틈이 없었던 것 같다. 한 달 동안 이 (공연) 리허설만 계속 해서. 진짜 안 낫는데 왠지 내일 나을 것 같다"라던 보아는 '코맹맹이 소리'가 심한데도 "최선을 다해" "한 음 한 음 열심히 부를 테니까 혹시나 음이 삑 해도 예쁘게 봐주시길 바라겠다"라며 마이크를 쥐었다. 일본 14번째 싱글 타이틀곡이자 내년이면 발매 20년이 되는 '메리 크리'(メリクリ)였다.
피아노 연주로 시작한 '메리 크리'를, 보아는 일본어 원곡 버전으로 불렀다. 전광판에는 한국어 가사를 띄웠다. 사랑하는 너를 바라보고 싶고, 나를 만나줘서 고맙다는 말을 계속하고 싶다는, 연인을 향한 애정이 듬뿍 담긴 노래였다. 보아는 예고한 대로 한 음 한 음 정성껏 불렀다. 방금까지 음 이탈을 걱정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까다로운 고음과 애절한 감정 표현까지 모두 해냈다.
보아의 20주년 콘서트 '더 보아 : 뮤지컬리티'는 노래하고 춤추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었다. 토크는 상대적으로 매우 짧았다. 보아는 "일본에서는 뭔가 아무 말 대잔치를 잘하는데 한국만 오면 말을 잘 못 하겠다"라며 "이사님이라 그래"라고 해 폭소를 유발했다. 이동차를 탔을 때 절대 안 일어나는 구역이 있어서 봤더니 기자들이라는 말을 해 잠시 분위기가 오묘해지자, 보아는 "여러분, 좋은 기사 써 주시려고 오신 분들이다. 그러지 맙시다"라고 해 다시 한번 웃음이 터졌다.
'마침내 난 꿈을 이뤘죠'라고 노래하는 자전적인 곡 '리틀 버드'(Little Bird)가 마지막 곡이었다. 살짝 눈물을 흘린 보아는 "감사하다"라며 "내 스무 살 생일에 온 걸 축하해"라고 외쳤다. 이렇게 공연이 마무리되는 듯했다. 이날 '먼 훗날 우리' 떼창은 물론 '나의 청춘이 되어줘서 고마워/새로운 스무 살을 축하해'라고 쓰인 종이 팻말 이벤트에, 내내 공연을 서서 즐기던 보아의 팬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든 곡이 끝난 후에도 자리를 지키며 보아를 연호했다.
이날 공연에는 소녀시대 효연, 엑소 수호·시우민, 레드벨벳 아이린·슬기·웬디, 에스파 카리나·윈터 등 SM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이 관람하러 와 힘을 보탰다. 3년 4개월 만에 열린 단독 콘서트에서 이틀 동안 5500여 명의 관객을 만난 보아는 오는 4월 1일 저녁 6시 부산 벡스코 오디토리움에서 추가 공연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