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자산 2천억 달러가 넘는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했다. 미국에서 파산한 은행 가운데 규모가 두 번째로 크다. SVB는 미국 스타트업 회사들에 대한 유동성 공급을 책임져온 만큼 고객 회사들의 줄도산 우려가 제기된다.
우리 정부도 SVB사태의 국내 영향을 점검하고 나섰다. 정부는 당장 국내에는 직접적인 영향이 없다는 분석이 다수라며 과도한 분석을 경계했지만, 국내외 금융시장, 실물경제 등에 대한 영향 등 여파가 주목된다.
SVB, 초저금리 배경 속 크게 성장했지만 금리 상승 파장으로 결국 폐쇄까지
SVB는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과 IT기업을 주고객으로 성장해왔다. 특히 지난 수년 동안 초저금리 속에서 신생 IT 업계가 호황을 맞자 SVB도 크게 성장했다.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시장 유동성이 커지자 SVB의 예금보유도 크게 늘어났다.
SVB는 이 예금 적립금으로 안정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미 국채와 주택저당증권에 투자했다. 2021년 당시 SVB는 약 1280억 달러 상당의 미국 국채 등 증권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자산 대비 대출보다 증권 투자 비율이 현저히 높았다.
그러나 코로나19 회복국면에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공격적인 기준금리 인상이 이어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예금 인출이 늘어나면서 SVB는 그간 사둔 증권과 국채를 헐값으로 팔 수 밖에 없었다. 금리 상승기 채권 가격이 급락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SVB는 큰 손실을 보게 됐다.
SVB는 지난 8일 예금 지급을 위해 미 국채로 구성된 매도가능증권(AFS·만기 전 매도 의도로 매수한 채권과 주식) 상당량을 매각, 18억 달러 규모의 손실을 봤다고 발표했다. 또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22억 5천만 달러 신주 발행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 발표는 다시 고객 불안감을 자극해 뱅크런을 가속했다. SVB의 예금 95%가량은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보증이 되지 않아서 뱅크런 사태에 구조적으로 취약한 상태였다. 시장 상황도 좋지 않아 자금 조달도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10일 미 예금보험공사는 은행 폐쇄를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SVB 폐쇄 영향 어디까지?…전세계 불안 휩싸여
블룸버그 통신 등에 따르면 SVB 영국지점도 파산 선언을 앞두고 있으며 이미 거래를 중단하고 신규 고객을 받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약 180개의 영국 정보기술(IT) 업체는 제레미 헌트 영국 재무장관에게 개입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이들은 "(은행이 문을 여는) 월요일에 위기가 시작될 것이므로 당국이 지금 막아줘야 한다"고 촉구했다.
헌트 영국 재무부 장관은 이번 사태의 영향을 받는 기업과 간담회를 하는 한편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 총재와 이번 사태를 논의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SVB가 캐나다를 포함해 중국, 덴마크, 독일, 인도, 이스라엘, 스웨덴 등지에도 진출해 현지에서 영업하고 있다면서 이번 사태가 시작에 불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우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SVB 파산과 관련해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대책을 논의했다. 백악관은 성명에서 "대통령과 주지사가 실리콘밸리은행과 이 상황을 다루기 위한 노력들에 대해 대화했다"고 설명했다.
미국과 이웃한 캐나다의 경우 즉각 공포 분위기가 조성됐다. 토론토의 광고 기술 개발 업체인 '어큐티 애즈'는 보유 현금의 90%에 달하는 5500만 달러(727억원)를 SVB에 넣어둔 상황이며, 나머지 은행에 있는 현금은 480만 달러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2021년 나스닥에 상장한 이 업체는 이에 따라 월요일인 13일 증시가 개장하기에 앞서 금요일인 10일 거래 중지를 요구하기도 했다.
실제로 SVB 캐나다 지점에서는 현지 테크 산업에 돈줄을 확대하고자 지난해 대출 규모를 두배로 늘린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금융당국도 파장에 '촉각'…정부 경제·금융회의서 분석 및 점검
SVB 파산이 국내외 금융시장에 미칠 영향에 대해 정부는 분석과 점검에 나섰다.
12일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거시경제 금융 현안 간담회에서 SVB 파산에 대해 "미국 은행 등 금융권 전반의 시스템 리스크로 확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추 부총리는 이 자리에서 "이번 미국 실리콘밸리은행 유동성 위기가 은행 폐쇄로 확산하면서 금융시장 변동성과 불확실성이 확대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서도 "오늘 간담회 참석자들은 아직은 이번 사태가 미국 은행 등 금융권 전반 시스템 리스크(위기)로 확산하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고 말했다.
특히 국내 은행의 경우 이번 사태와 관련된 게 없고 자본 건전성도 강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당장 직접적인 영향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 금융당국의 시각이다.
추 부총리는 "글로벌 금융긴축으로 시장 변동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국내외 금융시장, 실물경제 등에 대한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며 "정부와 관계기관은 관련 상황을 24시간 모니터링하고 필요한 경우 신속히 대응해 우리 경제 부작용으로 확산하지 않도록 관리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다만 우리나라로서는 이번 SVB의 파산이 향후 미국 연방준비제도로 하여금 0.25%포인트에서 0.5%포인트 인상을 고민하게 할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에 따르면 SVB 은행 파산 직후에는 약 60%에 달하는 금리 선물 시장 참가자들이 3월 FOMC에서 25bp 인상을 예상했다. 주말 동안 연준의 50bp 인상 전망은 다시 70%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높아진 상태다.
박승진 하나증권 연구원은 "여전히 세부 시그널들이 혼재되어 있고, 재정지출과 증세안의 대립 가운데 SVB처럼 강도 높은 긴축의 결과로 발생한 새로운 변수들도 등장하고 있다"며 "미국채 10년물 기준 4.10%의 고점을 확인한 후 다시 레인지 트레이딩 국면으로 진입하는 관점에서 시장 대응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