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길을 걷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어려운 고비를 넘어야 대단하다는 인정을 받기 마련이다. 역경을 이겨내니까 '슈퍼맨'이다.
대한당구연맹(KBF) 시절 국내 3쿠션 1인자로 군림했던 조재호(42·NH농협카드). 마침내 프로당구(PBA)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조재호는 12일 경기도 고양시 JTBC 스튜디오 일산에서 끝난 'SK렌터카 PBA-LPBA 월드챔피언십 2023' 남자부 결승에서 다비드 마르티네스(크라운해태)를 눌렀다. 4시간 가까운 혈투 끝에 세트 스코어 5 대 4(12-15 15-12 7-15 15-8 9-15 15-12 15-7 11-15 15-8)로 힘겹게 이겼다.
우승 트로피와 함께 상금 2억 원을 거머쥐었다. 올 시즌을 완전히 조재호의 시즌으로 만들었다. 조재호는 시즌 개막전인 블루원리조트 챔피언십과 정규 투어 최종전인 크라운해태 챔피언십에 이어 시즌 상금 랭킹 32명만 출전하는 왕중왕전인 월드 챔피언십까지 3관왕에 올랐다.
조재호는 PBA 남자부 한국 선수의 새 역사를 썼다. 3번째를 맞은 왕중왕전에서 첫 국내 선수 챔피언에 올랐고, 더불어 4번째 시즌을 맞는 PBA에서 처음으로 국내 선수 상금 랭킹 1위에 올랐다. 올 시즌 조재호는 4억2250만 원을 벌어들였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조재호는 이번 대회 조별 리그에서 1승 2패로 탈락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세트 득실 차로 가까스로 조 2위를 확보해 16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16강 상대가 최강이자 디펜딩 챔피언 프레드릭 쿠드롱(벨기에·웰컴저축은행)이었다. 역대 최다 7회 우승과 지난해 왕중왕전 정상까지 쿠드롱은 PBA 최강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조재호는 쿠드롱을 세트 스코어 3 대 1로 누르고 8강에 진출했다.
8강과 4강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PBA 초대 대회 챔피언 등 2승을 거둔 '그리스 괴인' 필리포스 카스도코스타스(하나카드)와 PBA 투어 우승 경험이 있는 하비에르 팔라존(스페인·휴온스)이었다. 그러나 조재호는 각각 3 대 2, 4 대 1 승리를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에서 붙은 마르티네스는 쿠드롱에 이어 역대 다승 2위(3승)의 실력자. 결승에서도 1, 3, 5세트를 따내며 조재호를 밀어붙였고, 세트 스코어 3 대 4로 뒤진 8세트 기어이 승부를 최종 9세트로 몰고 갔다.
그러나 조재호의 막판 뒷심에 마르티네스는 우승컵을 내줘야 했다. 조재호는 이번 대회 도합 13승을 거둔 상대들을 누르고 정상에 오른 것이다. 경기 후 마르티네스는 "먼저 세트를 따냈지만 조재호가 곧바로 따라붙으면서 어렵고 힘들었다"면서 "조재호가 너무 좋은 경기력을 보였다"고 패배를 인정했다.
조재호는 소감을 묻자 "얼떨떨해서 잘 모르겠다"면서 "우승한 게 맞나 싶고, 마지막 공도 어떻게 들어갔는지 모르겠다"며 우승 실감이 나지 않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너무 행복하다"고 환하게 웃었다.
이번 대회는 조별 리그부터 힘들었다. 그러나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모양새다. 조재호는 힘들었던 일정에 대해 "소위 대진표가 좋은 대회에서 우승해본 기억이 없었다"면서 "긴장이 확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16강전 뒤 '쿠드롱을 이기고 우승한 사람이 없다'는 기사 댓글을 보고 우승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면서 "그런데 8강전이 너무 안 풀려서 마음을 비우니 풀리더라. 그냥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낀다"고 했다.
역경을 두려워 하지 않고 마음을 비우며 도전했더니 된 것이다. 조재호는 "긴장된 순간, 박빙의 순간에서 예전 같으면 실수하고 졌을 상황에서 요즘에는 한두 번씩 해결해내니 상대가 실수를 범하고 세트를 따내더라"고 돌아봤다. 이어 "지고 있을 때 한 방 쳐야 한다, 강심장을 가져야 한다는 걸 느낀다"면서 "많이 지고 있을 때 한두 큐에 승부를 보면 상대방도 알아서 흔들리고 이기니까 재미가 있다"고 미소를 지었다.
올 시즌 PBA를 평정했지만 조재호는 벌써부터 훈련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다. 조재호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면서 성적이 계속 좋아졌다"면서 "이제 다음 시즌까지 3개월 시간이 비니까 운동을 좀 해서 체중을 빼야 할 거 같다"고 비시즌 계획을 밝혔다. 이어 "트레이너에게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경기 때 할 수 있는 운동법을 부탁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재호는 다음 시즌 목표를 묻자 "올 시즌 너무 잘 해서 다음 시즌이 부담스럽다"면서도 "내년에도 이 자리(우승 기자 회견)에 앉아서 인터뷰할 시간이 있기를 소망하면서 훈련하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역경과 위기를 이겨낸 선수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