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B컷]尹정부가 지운 日의 '강제동원 책임'…사법부 부담만 커진다

정부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해 판결금과 지연이자를 지급하겠다는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한 6일 오후 시민들이 서울 용산역 광장에 세워진 강제징용노동자상을 바라보고 있다. 황진환 기자

윤석열 정부가 대법원에 판결 선고를 미뤄달라고까지 요구하며 내놓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 방안은 '제3자 변제'입니다. 한국 정부가 만든 재단에 민간 기업이 돈을 내 배상하는 방식인데 일본 기업의 참여를 강제하는 조항은 없습니다. 그러면서 일제의 강제동원 전쟁 범죄의 피해를 자칫 한국 기업의 돈으로만 배상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오늘 '법정B컷'은 일제 강제동원 손해배상을 둘러싼 한국과 일본 법원의 판결 등 수십년 간 평행선을 달려온 한국과 일본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한국 최고 법원인 대법원의 판결과는 너무나 다른 방향으로 나온 윤석열 정부의 배상안, 그로 인해 부담이 커진 한국 법원의 모습을 전해드리겠습니다.

1965년 '청구권협정'부터 2012년 '대법원 판결'까지 

일본제철 본사 앞 안내판. 연합뉴스

일제로부터 노동력을 착취당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1997년 일본제철을 상대로 오사카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냅니다. 하지만 오사카지방법원은 2001년 일본제철의 손을 들어줬고, 이 판결은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확정됩니다.

당시 일본 재판부는 '조선은 일본국의 통치를 받던 곳이었고, 또 당시 일본국이 적극적인 동원 정책을 펼치긴 했지만 이들이 자발적으로 온 것'이라며 강제 동원 범행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일본은 지금도 여전히 강제 동원 범행을 인정하지 않으며, 배상이 아닌 보상이란 단어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또 일본 사법부가 근거로 든 것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입니다. 일본 정부는 지금도 한일 청구권 협정을 전면에 내세우며 손해배상(위자료)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1965.6.22 한일 청구권 협정 中
제 2조 1항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임을 확인한다"

제 2조 3항
"(중략) 일방 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 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해서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1951년 9월 연합국과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맺습니다. 자신들이 식민지로 삼던 지역에 대한 전후 처리 등을 위한 조약이었죠. 그리고 이후 한국과도 채무 처리를 위한 회담을 수차례 진행했고, 위 내용이 담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맺습니다. 일본은 이 내용들을 근거로 식민 지배에서 벌어진 모든 일에 대한 청구는 끝났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하지만 2012년 5월, 한국 최고 법원인 대법원은 다른 판단을 내놓습니다.

2012.5.24 대법원, 일제 강제징용 사건 손해배상 선고 中
"민사소송법 제217조 제3호는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 질서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외국 판결 승인 요건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중략)

"일본 판결의 이유에는 일본의 한반도와 한국인에 대한 식민 지배가 합법적이라는 규범적 인식을 전제로 하고, 일제의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을 한반도와 원고 등에게 적용하는 것도 유효하다고 평가한 부분이 포함돼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판결 이유는 일제 강점기의 강제 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판결 이유가 담긴 일본 판결을 그대로 승인하는 결과는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 질서에 위반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일본 판결을 승인해 그 효력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대법원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명백한 불법 행위이고, 강제 동원도 불법임이 명백한데 이를 인정하지 않고서 내린 일본 사법부의 판결을 국내에 적용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또 대법원은 당시 한일청구권협정은 한국과 일본 정부 간의 재정적, 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합의였을 뿐 일제로부터 불법 행위를 당한 개인들의 손해배상이 포함된 협정이 아니라고 봤습니다. 쉽게 말해 해당 조약에는 개인들에 대한 손해 배상(위자료) 내용이 담기지 않았기에, 개인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일본 주장은 틀렸다는 겁니다.

2012.5.24 대법원, 일제 강제징용 사건 손해배상 선고 中
"한일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해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 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청구권협정의 협상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했고 이에 따라 한일 양국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됐다고 보기 어려운 점 등에 비춰 보면, 청구권협정으로 (강제동원 피해자의) 개인 청구권이 소멸하지 아니하였음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도 포기되지 아니하였다고 봄이 상당합니다"


피해자 개인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살아있다는 점은 우리 대법원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도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지난 1992년 일본 외무성 조약국장도 이를 인정했고, 2018년 11월에는 당시 일본 외무상이었던 고노 다로도 일본 의회에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인정합니다.

2013년에도 2022년에도 '방안' 찾겠다며 사법부 압박한 행정부

일제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왼쪽), 김성주 할머니가 7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굴욕적인 강제동원 정부해법 강행 규탄! 일본의 사죄배상 촉구!' 기자간담회를 갖고 있다. 황진환 기자

결국 대법원은 2012년 5월 24일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며 사건을 파기 환송했고, 사건을 돌려받은 서울고법도 2013년 7월, 일본제철이 1억 원씩 배상하라며 피해자 승소 판결을 내립니다.

그러자 일본제철은 재상고합니다. 다시 대법원의 판단을 받겠다는 것인데 대법원은 어떤 이유에선지 확정 판결을 내리지 않습니다. 대법원의 확정 판결은 무려 5년이나 지난 2018년 10월 30일에야 나옵니다.

대법원이 이미 피해자 승소로 판결하며 파기환송한 사건을 확정하는데 왜 5년이나 걸렸을까요?

그 중심에는 박근혜 정부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의 '사법농단 의혹'이 있습니다. 한일 관계 악화를 우려한 박근혜 정부가 판결을 미루거나 다시 심리해야 한다며 양승태 사법부를 압박했고, 상고법원 설치라는 숙원 사업이 있던 양승태 사법부가 이에 호응했다는 겁니다. 강제동원 손해배상 확정 판결을 5년이나 미루는 등 재판을 거래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현재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5년이나 미뤄진 후과는 너무나 컸고 치명적이었습니다.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의 확정 판결 이후 다수의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이 일본 전범 기업을 상대로 소송에 나섰지만, 패소합니다.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는 손해 및 가해자를 인지한 날로부터 3년입니다. 그 사이에 청구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시효가 끝나 청구권이 사라집니다.

대법원이 "일본 기업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첫 판결을 내린 2012년 5월 24일을 '손해 인지 시점'으로 간주한다면 2015년 5월 이후 소송을 낸 피해자들은 모두 청구권이 사라지는 겁니다. 대법원의 확정 판결만을 기다리다가 2018년 10월 30일 확정 판결이 나오자 소송을 낸 피해자들은 해당 기준을 적용하면 모두 패소하는 겁니다.

반면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온 2018년 10월 30일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 승소하는 것이죠. 결국 어떤 재판부에선 2012년 5월을 기준으로 삼고, 또 다른 재판부는 2018년 10월을 기준으로 삼고 있어서 재판부마다 판결이 엇갈리는 혼란이 현재 전국 법원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2023.2.24 서울중앙지법, 日 니시마츠 강제동원 손해배상 1심 선고 中
재판부

"니시마츠 측은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원고들(피해자)의 청구권 소멸을 주장하지만, 관련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청구권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다만 대법원 판결 중에 어떤 시점을 기준으로 기산해야 하는지가 쟁점인데, 저희 재판부는 파기환송 판결한 최초의 판결(2012년 5월)을 청구권 소멸 시효 기산점으로 봤습니다. 이에 소멸시효 기간이 이미 지났다고 봐서 손해배상 청구는 어렵습니다.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합니다"

도쿄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연합뉴스

행정부가 사법부에 판결을 미뤄달라고 요구한 일은 2022년에도 있었습니다.

대법원의 2018년 판결에도 미쓰비시 등 일본 기업들은 손해 배상에 나서지 않으며 버티기에 들어가자 대전지법은 2021년 9월, 미쓰비시 등이 국내에 보유하고 있는 자산에 대해 압류와 매각을 명령합니다.

미쓰비시는 매각 판결에 반발하며 사건을 대법원까지 끌고 갑니다. 법조계에선 대법원이 지난해 8월 19일에 결론을 내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대법원은 판결을 미룹니다. 외교부가 앞서 7월 26일, 대법원에 '정부가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달라'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며 사실상 사법적 판단을 미뤄달라고 요구한 겁니다.

외국 기업의 자산을 강제 매각하는 것이 상당한 부담이었을 대법원이 정부에 협상의 시간을 벌어준 것이란 법조계 평가가 나왔지만, 피해자를 비롯한 시민단체는 강하게 반발합니다. 양승태 사법부의 악몽은 물론 이미 고령인 피해자들에게는 계속해 지체되는 법원의 시간이 잔인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대법원 판결 무력화 한 尹정부 배상안… 실타래 꼬인다

스마트이미지 제공

이처럼 대법원에 사법적 판단을 늦춰달라고 한 뒤 일본 정부와의 기나긴 줄다리기 끝에 외교부가 이달 6일 내놓은 강제동원 배상안은 대법원의 2012년, 2018년 판결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행정안전부 산하에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 재단'을 만들고 민간의 자발적 기여를 통해 만든 돈으로 지원하겠다는 것이 주요 골자인데, 일본 기업의 참여를 강제하는 조항은 없습니다. 향후 장기적으로 일본 기업의 참여가 있을 것이란 설명이 달렸을 뿐입니다.

강제동원 전쟁 범죄의 주체인 일본이 아닌 한국 정부가 만든 재단이 배상에 나서는 방안을 발표한 직후 한국과 일본은 정상회담을 열기로 했습니다. 물론 가능성이 높진 않지만 정상회담에서 일본이 과거보다 더 전향적인 사과 입장을 발표하거나 아니면 어떠한 조치를 내놓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사법부의 부담이 커진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일단 현재 전국 법원에서 진행 중인 일본 전범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은 앞으로도 대법원 판례에 따라 '일본 기업이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정부는 현재 소송이 진행 중인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재단을 통해 배상한다는 입장입니다. 피해자들이 이러한 방식의 배상을 거부할 경우 이는 또 다른 법적 다툼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앞서 본 미쓰비시 등 일본 기업의 국내 자산 매각 명령에 대법원이 언제, 어떠한 판단을 내릴 지에도 관심이 쏠립니다.

대법원은 이미 2022년 1월, 자산 압류 결정에 반발한 미쓰비시의 재항고를 기각하며 압류를 최종 결정한 바 있습니다. 후속 절차인 매각에 대해선 '협상의 시간 좀 달라'는 윤석열 정부 외교부의 요청 내지 압박을 받아들여 현재까지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는 법원의 시간이란 지적이 나옵니다. 지난 6일 대법원으로부터 시간을 벌어간 외교부가 '제3자 변제'라는 결과물을 가져왔으니, 이제 대법원이 판단을 내려야 할 차례라는 겁니다.

제3자 변제를 수용하는 피해자도 있을 것이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피해자도 있을 겁니다. 제3자 변제를 원하지 않고, 일본 전범 기업의 국내 자산 매각을 원하는 피해자들에 대해 대법원이 결국 답을 줘야 할 차례인 겁니다. 윤석열 정부가 전격적으로 강제동원 배상안을 밀어붙인 상황에서 대법원이 차일피일 매각 결정을 미룰 가능성도 있습니다.

일제 강제동원 관련 재판을 두고선 잔인한 법원의 시간이란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일제로부터 인권을 유린당한 이들은 이미 너무나 고령입니다. 소송전이 수십 년 간 이어지며 이미 고인(故人)이 된 이들도 많습니다. 빠른 절차 진행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 범죄 가해자들의 책임이 반영된, 그래서 피해자들이 온전히 수용할 수 있는 결과물일 겁니다.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