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에 사는 '유령 세입자'…위조 계약서에 뚫린 전입신고

수상한 우편물 수신인은 집주인·세입자도 모르는 인물
'유령 세입자' 버젓이 세대주로 등재…제출한 계약서는 '위조'
행정복지센터 실거주 여부 확인에도 걸러지지 않아
행안부 "신분 확인 방법 등 제도 개선안 마련하겠다"

A씨가 소유한 부산 연제구 아파트의 전입세대 확인서. 기존 세입자가 세대주로 등재된 데 더해, 아무도 모르는 제3의 인물이 추가로 세대주로 전입했다고 표시돼 있다. A씨 제공

최근 전국에서 전입신고 제도의 허점을 노린 대출사기 사례가 잇따르는 가운데, 부산에서도 집주인이나 세입자가 모르는 제3의 인물이 전입 신고해 수개월째 '세대주'로 버젓이 서류상에 등재된 사례가 나왔다.
 
이 '유령 세입자'는 전입신고에서 위조한 계약서를 내고 실제로 거주하지도 않았지만, 행정당국은 이 같은 사실을 수개월째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부산 연제구 연산동에 아파트 한 채를 소유 중인 30대 직장인 A씨는 최근 세입자로부터 황당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세입자는 A씨에게 "얼마 전부터 B라는 이름이 적힌 우편물이 집으로 계속 날아온다. 최근엔 경찰이 집으로 찾아와 B라는 사람이 살고 있는지 묻고 가기도 했다"며 "혹시 B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다.
 
B라는 이름을 난생처음 들은 A씨는 세입자를 찾아가 보관하고 있는 우편물을 살펴봤다. 우편물은 서울 · 경기 지역 경찰서와 신용정보회사 등에서 B라는 사람에게 보낸 것이었다.
 
A씨의 집주소로 날아든 우편물들. 경찰서나 신용정보회사 등에서 정체 모를 'B씨'에게 보낸 우편물이다. A씨 제공

수상함을 감지한 A씨는 곧바로 행정복지센터를 찾아가 누가 집에 전입신고를 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서류인 '전입세대 확인서'를 열람한 뒤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확인서에는 A씨와 전세 계약을 맺은 기존 세입자가 세대주로 지난 2021년 12월 전입신고한 뒤, 6개월 지난 시점에 B라는 인물이 또 다른 세대주로 전입했다고 적혀있었다.
 
서류상 '유령 세입자'의 등장에 A씨는 즉각 행정복지센터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행정복지센터 관계자는 "B씨가 전입신고 시 제출한 임대차계약서가 있다"며 서류를 제시했다.
 
행정복지센터가 제시한 임대차계약서는 집주인인 A씨가 작성·날인을 한 적 없는 문서였다. 익히 알고 있는 표준임대차계약서 양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데다, 계약서에 적힌 A씨의 주소지나 연락처는 허위였고 도장 역시 A씨의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계약 당사자의 주민등록번호는 기재조차 되어 있지 않은 엉성한 서류였다.
 
A씨는 "B라는 사람이 계약서를 위조해 전입신고할 때 제출한 것으로 보이는데, 행정복지센터는 아무런 추가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그저 서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전입신고를 받아들였다"며 "계약서에 적힌 전화번호로 확인 전화를 걸어보거나, 최소한 B라는 사람이 실제로 거주하는지라도 확인했다면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어 "최근 집주인이 이런 식으로 '유령 세입자'를 들여 대출을 허위로 받는 등 사기 사례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런 일이 터지면 당연히 불안한 세입자는 전세 재계약을 안 하려고 할 것"이라며 "전입신고가 허술하게 처리된 탓에 세입자에게 해명 아닌 해명을 해야할 뿐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느라 경찰서나 행정복지센터 등으로 뛰어다니고 있어 회사 업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고 피해를 호소했다.
 
'유령 세입자'가 A씨 소유 아파트에 전입신고하면서 행정복지센터에 제출한 임대차계약서. 계약서 상 A씨의 주소나 연락처, 도장 등은 모두 가짜였다. A씨 제공

이에 대해 부산 연제구청과 해당 행정복지센터는 '유령 세입자' B씨의 전입신고를 관련 절차에 따라 정상 처리했다면서, 제출된 계약서의 진위 여부까지 확인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해당 행정복지센터 관계자는 "기존 세대주가 있는 곳에 새로 세대주를 등재하는 경우 통상 계약서를 확인하고 처리하는데, 이 경우는 계약서에 주소나 금액, 당사자 인적사항이 적혀 있는 것까지 다 확인했다"며 "계약서 진위 여부까지 우리가 판단하기는 힘들다. 개인정보라서 일일이 다 열어볼 수도 없다"고 말했다.
 
연제구청 관계자는 "전입신고 자체가 '신고주의'라서 신고를 일단 받은 뒤 통장들이 실제 거주하는지 사후확인을 하는데, 이 건은 수개월이나 지난 일이라 당시 사후확인이 이뤄졌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며 "원래는 전입자 본인 서명을 받지만 집이 비어있으면 관리사무소를 통해 확인한다거나, 특히 코로나19 탓에 비대면으로 확인한 경우도 있었던 건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전입신고 제도의 허점을 노려 대출사기 등에 악용하는 사례가 늘자, 행정안전부는 지난해 10월과 이달 8일 두 차례에 걸쳐 지방자치단체에 전입신고 시 유선 연락이나 신분증 원본 확인 등을 철저히 하도록 당부한 바 있다. 하지만 명확한 제도적 장치는 없는 실정이다.
 
민원인 스스로 '전입세대 확인서'를 행정복지센터에 직접 찾아가 열람하거나, 누군가 내 집에 전입신고할 경우 문자로 내용을 통보하는 '전입신고·세대주 변경 통보서비스'를 신청하는 예방책은 있으나, 이를 통해 '유령 세입자'의 전입신고를 원천 차단할 수는 없다.
 
이에 행정안전부는 9일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가 없도록 전입신고 때 구체적인 신분 확인 방법을 법령에 규정하는 방안 등 추가 제도 개선안을 마련해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