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녹초가 된 몸을 정신력으로 버텼다. 태극 마크를 달고도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다시 국가대표 선발전을 치러야 했던 어쩌면 억울했을 심경과 부담감을 이겨낸 극적인 우승이었다.
'2023 소프트테니스 국가대표 선발전' 마지막 날 남자 단식 결승이 열린 8일 전북 순창군 공설운동장 하드 코트. 김태민(27·수원시청)이 인천시체육회 서권을 잇따라 누르고 정상에 올랐다.
김태민은 패자 부활전을 통해 결승에 올라 2승을 해야 우승할 수 있는 핸디캡이 있었다. 반면 승자 결승에 오른 서권은 1경기만 이겨도 대망의 태극 마크를 달 수 있는 상황.
하지만 김태민의 간절함이 더 컸다. 김태민은 앞서 복식까지 15경기, 단식까지 10경기를 치러 체력이 고갈된 상태였지만 정신력으로 버텼다. 서권은 절묘한 드롭샷과 좌우 코너를 찌르는 스트로크를 펼쳤지만 192cm 장신의 김태민은 긴 다리로 코트 구석을 커버하며 맞서 결승 1차전을 게임 스코어 4 대 1로 이겼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김태민의 절실함에 운이 따랐다. 결승 2차전에서는 바람이 더욱 강해져 서권이 첫 게임에서 서브 더블 볼트를 잇따라 범한 것. 서권이 흔들린 사이 김태민은 바람을 안고 강력한 스트로크를 날렸다. 맞바람에 공이 뚝 떨어지는 점을 이용한 것. 코트 체인지가 이뤄졌지만 이미 2게임을 먼저 딴 김태민은 결국 4 대 1로 2차전까지 쓸어 담았다.
우승이 확정되자 김태민은 눈물을 쏟았다. 코트로 달려온 김진웅 등 팀 동료들이 운다고 놀렸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동료들도 이내 숙연해지며 김태민이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줬다.
김태민은 관중석에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수원시청 임교성 감독과 박규철 코치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임 감독은 "복식부터 마지막 단식까지 너무 힘들었다"면서 "차라리 내가 뛰는 게 나을 정도로 지옥 같았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만큼 마음고생이 심했다. 당초 김태민은 지난해 대표 선발전에서 팀 선배 김진웅과 복식 1위를 차지해 항저우아시안게임에 출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와 중국의 정치적 상황 등이 맞물려 대회가 1년 연기됐다. 졸지에 김태민은 다시 선발전을 치러야 했다.
더군다나 김태민은 올해 태극 마크를 달지 못하면 곧바로 군에 입대해야 할 처지였다.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면 그래도 병역 혜택을 받을 기회가 생기지만 그러지 못하면 선수 생활을 중단해야 할 위기였다. 게다가 지난해 아시안게임에 나섰다면 후회도 없었을 테지만 외부적 요인으로 대회 자체가 열리지 못했다.
이런 부담감에 김태민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첫 복식에서는 결승에 오르지 못해 순창군청 윤형욱-김병국이 우승했고, 2번째 복식에서는 패자 부활전 끝에 결승까지 갔지만 아쉽게 달성군청 이현수-김현수에 4 대 5로 졌다. 이후 김태민은 마지막 단식에서도 패자 부활전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김태민은 체력적, 정신적으로 극한의 상황을 이겨냈다. 발바닥에 물집이 터질 만큼 뛴 김태민은 정말 기력이 소진한 듯 작은 목소리로 "너무 힘들었다"면서 "지난해 선발이 됐는데 다시 경기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며 눈물의 의미를 밝혔다. 이어 "이번에도 김진웅 형님과 복식에 나섰는데 2차전에서 패자 결승까지 6번이나 이겨서 올라갔는데 졌다"면서 "형이 많이 도와줬는데 너무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오히려 마음을 비웠더니 더 좋은 결과가 나왔다. 김태민은 "욕심을 낸다고 되는 게 아니니 마음을 비우고 열심히만 하자고 했더니 됐다"고 그제서야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렵게 얻은 기회인 만큼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내겠다는 각오다. 김태민은 "지난해는 대회가 열리지 않았는데 올해는 지난해 못한 부분까지 준비해서 꼭 좋은 성적을 내겠다"고 다짐했다. 이어 "아시안게임 대표 선발이 되지 않으면 군 입대해야 할 상황이었다"면서 "선발돼서 다행이고 진웅이 형처럼 결실을 내고 싶다"고 강조했다.
김진웅은 28살이던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에서 입대 영장을 받고 대회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내며 극적으로 병역 혜택을 받았다. 이날 후배의 우승을 지켜본 김진웅은 "내가 더 가슴이 떨렸다"면서 "내가 5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태민이도 낭보를 전해오면 좋겠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