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1라운드에서 펼쳐진 한일전은 한국 야구를 상징하는 키워드 '약속의 8회'를 널리 알린 경기였다.
'국민타자'로 불렸던 이승엽은 한일전을 하루 앞두고 열린 중국과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포함해 4안타 5타점을 쓸어담으며 절정의 컨디션을 자랑했다.
하지만 일본과 경기에서는 3회 2사 만루, 5회 2사 1,3루 득점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한국이 일본에 1-2로 끌려가던 8회 1사 1루에서 이승엽이 다시 타석에 섰다. 이번에는 달랐다. 일본프로야구 야쿠르트의 좌완 이시이 히로토시의 슬라이더를 때려 도쿄돔 오른쪽 담장을 넘어가는 호쾌한 역전 투런홈런을 쏘아올렸다.
당시 이승엽은 지바 롯데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상태였다. 일본프로야구에서 쌓은 경험은 큰 힘이 됐다. 그는 "볼카운트 2볼-1스트라이크에서 던진 직구가 볼이었다. 경험상 다음은 변화구가 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동안 쌓은 일본야구 경험이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경험의 힘은 한국 야구가 WBC 첫 한일전에서 3-2로 이길 수 있었던 결정적인 힘이 됐다.
김인식 대표팀 감독은 1점 차로 앞선 9회 마무리 투수로 베테랑 메이저리거 박찬호를 투입했다. 그는 "마무리 투수가 오승환인 건 사실이지만 경험, 큰 경기라는 점에서 큰 무대에서 활약한 박찬호가 낫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박찬호는 9회 2사에서 스즈키 이치를 내야플라이로 잡아내고 어퍼컷 세리머니를 펼쳤다.
"30년 동안 한국 야구가 일본에 손을 댈 수 없다는 느낌이 들도록 이기고 싶다"는 30년 발언으로 화제를 불러모았던 이치로를 '코리안특급' 박찬호가 잡아낸 순간은 한국 야구에 잊지 못할 명장면으로 남아있다.
당시 일본은 오사다하루 감독의 지휘 아래 이치로, 마쓰자카 다이스케, 후지카와 규지, 우에하라 고지,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등 화려한 스타 군단을 자랑했지만 한수 아래로 여겼던 한국 야구에 일격을 맞고 적잖은 충격에 빠졌다. 한국에게는 야구의 '도쿄대첩'이라 부를만한 승부였다.
한국은 약 열흘 뒤 미국으로 장소를 옮겨 재대결을 펼쳤다. 한국은 2라운드 한일전에 앞서 메이저리거들이 대거 포진한 멕시코와 미국을 연파하며 거침없는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이번에도 일본프로야구를 잘 아는 베테랑이 힘을 냈다. 바로 '바람의 아들' 이종범이었다. 이종범은 8회 1사 1,3루에서 후지카와를 상대로 0-0 균형을 깨는 결승 2타점 적시타를 쳤다.
한국 야구의 레전드들이 힘을 모았다. 박찬호는 선발로 나서 5이닝 무실점으로 일본 타선을 틀어막았고 당시 프로야구의 떠오르는 마무리였던 오승환은 1점 차 리드를 지켜내며 포효했다.
투구수 제한이라는 독특한 규정 안에서 절묘한 마운드 운영으로 6연승 전승 행진을 이끈 김인식 감독을 두고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mlb닷컴)는 "한국의 토니 라루사"라는 호평을 하기도 했다. 토니 라루사는 경기 운영 능력이 출중한 메이저리그의 대표적인 명장이다.
한일전 승리 이후 애너하임 야구장의 마운드에 태극기가 세워진 순간도 한국 야구의 명장면으로 기억된다.
2006년 WBC에서 펼쳐진 세 번째 한일전에서는 0-6으로 크게 졌다. 2라운드 1조에서 미국, 멕시코가 나란히 1승2패를 기록한 뒤 공방률에서 앞서 극적으로 4강에 합류한 일본은 절치부심해 자존심 회복에 성공했다. 더 나아가 초대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2009년에 열린 제2회 WBC 대회의 핵심 키워드는 크게 두 가지였다. 세대교체 그리고 '한일(韓日)베이스볼클래식'이었다.
박찬호, 이승엽, 박진만이 대표팀을 떠났고 그 자리를 2008년 베이징올림픽 우승의 주역 류현진, 김광현, 이대호 등이 채웠다.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추신수도 태극마크를 달았다.
2009년 대회는 더블-엘리미네이션이라는 독특한 제도로 인해 한국과 일본은 한 대회에서 무려 다섯 번이나 맞대결을 펼쳤다.
1라운드 첫 한일전 선발투수는 김광현이었다. 2008년 중국 베이징에서 눈부신 호투로 일본야구의 자존심을 무너뜨렸던 주역이다. 당시 일본 주요 TV매체들은 한일전을 앞두고 김광현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하며 상당한 경계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첫 승부는 굴욕적인 결과로 끝났다. 김광현은 1⅓이닝 8실점을 기록했고 한국은 2-14로 7회 콜드게임 패배를 당했다.
그로부터 3일 뒤 아시아라운드 1위 자리를 놓고 두 번째 한일전이 펼쳐졌다.
일본야구의 간판 이치로가 1회 선두타자로 타석에 서자 도쿄돔은 축제 분위기가 됐다. 관중석 이곳저곳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콜드게임 승리를 거둔 기억과 일본야구의 자신감이 도쿄돔을 가득 채웠다.
한국 선발 봉중근은 흔들리지 않았다. 초구 구사를 앞두고 구심을 호출했다. 플래시가 방해가 된다는 항의였지만 실제로는 메이저리거 출신으로서 메이저리그 소속 심판과 장난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여유가 느껴졌다.
봉중근은 일본 타선을 5⅓이닝 무실점으로 압도했다.
김태균은 4회 일본의 에이스 이와쿠마 히사시를 상대로 적시타를 쳤다. 3일 전 콜드게임 패배를 당했던 한국은 리턴매치에서 일본을 1-0으로 꺾는 반전 드라마를 연출했다.
최대 승부처는 8회였다. 일본은 1사 1루에서 희생번트를 지시하는 과감한 작전을 시도했다. 컨택트 능력이 탁월한 아오키 노리치카에게 기대를 거는 승부수였다.
하지만 마운드에는 아오키와 함께 야쿠르트 소속이었던 임창용이 있었다. 임창용은 아오키를 투수 땅볼로 잡아내고 일본에 좌절감을 안겼다.
하라 다쓰노리 일본 감독은 패배 후 "14점 이후 0점. 이것이 바로 야구"라며 패배를 인정했다.
이어 "첫 경기를 이겼을 때도 한국과는 앞으로 여러번 맞붙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고 했다. 그 마음이 더 고조되고 더 강해지고 있다. 한국과 일본이 아시아 야구를 세계에 알린다는 목적 하에 끝까지 살아남았으면 한다. 가슴과 가슴을 부딪히는 힘과 힘의 대결로 도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예상처럼 한국과 일본은 계속 맞붙었다.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세 번째 한일전이 펼쳐졌다. 한국과 일본은 2라운드에서 각각 멕시코와 쿠바를 꺾고 4강 직행 티켓이 걸린 본선 승자전에서 만났다.
일본의 당시 선발투수는 오는 10일 제5회 WBC 대회의 한일전 선발로 내정된 다르빗슈 유였다.
한국은 1회부터 날카로웠다. 테이블세터 이용규와 정근우의 활약으로 만든 득점권 기회에서 상대 실책과 이진영의 적시타로 3점을 뽑았다.
한국은 이번에도 봉중근 카드를 꺼내들었다. 도쿄 한일전 승리의 주역 봉중근은 5⅓이닝 1실점 호투를 펼쳤고 한국은 일본을 4-1로 꺾고 두 대회 연속 4강 진출을 확정했다. 일본야구의 자존심이 또 한번 꺾였다.
이후에도 한일전은 계속 됐다. 일본은 패자전에서 쿠바를 꺾고 4강행 티켓을 땄고 이미 4강 진출이 결정된 상황에서 펼쳐진 1-2위 결정전에서는 일본이 한국에 6-2로 이겼다.
한국이 4강에서 베네수엘라를, 일본이 미국을 각각 꺾으면서 결승전마저 한일전으로 펼쳐졌다. 이 대회가 한일(韓日)월드베이스볼클래식으로 불렸던 이유다.
한국은 연장 접전 끝에 3-5로 지고 준우승에 머물렀다. 임창용이 연장 10회초 2사 2,3루에서 이치로에게 통한의 결승타를 허용했다. 김인식 감독은 패배 후 이치로를 거르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여러모로 아쉬운 순간이었다.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한동안 WBC 무대에서 한일전을 볼 수 없었다. 한국은 2013년과 2017년 대회에서 연이어 1라운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첫 관문을 넘어서야 일본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은 지난 9일 대회 첫 경기에서 호주에 7-8로 패해 이미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다. 이 같은 흐름에서 10일 오후 7시 일본 도쿄돔에서 14년 만에 WBC 한일전이 펼쳐진다. WBC 통산 맞대결 전적은 4승4패로 호각세다. 2006년과 2009년에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객관적인 전력은 일본이 한수위라는 평가다.
하지만 야구가 늘 예상대로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 법이다. 한일전은 특히 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