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반도체 패키징(후공정) 첨단 기술 경쟁에 돌입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는 대만의 TSMC, 메모리 반도체는 우리나라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압도적인 글로벌 점유율을 확보한 반면, 패키징 시장의 절대 강자는 없는 상황.
특히 반도체 기술 혁신의 한계가 임박한 수준인 가운데, 높은 기술력이 필요한 패키징 시장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다.
커지는 패키징 시장…글로벌 절대 강자도 없어
8일 업계에 따르면, 반도체 생산은 크게 △설계 △생산 △패키징 등을 거친다. 설계와 생산을 전(前)공정, 패키징을 후(後)공정이라고 부른다.
보통 메모리 반도체는 설계와 생산을 하나의 기업이 도맡는다. 비메모리 반도체(시스템 반도체)는 설계와 생산 공정을 각각 전문 기업이 담당한다. 공정별로 설계는 '팹리스', 생산은 '파운드리'라고 한다.
글로벌 반도체 생산 시장의 비중은 파운드리 70%, 메모리 반도체 30%로 나뉜다.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TSMC가 파운드리 부문에서 56%,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 70% 등이다. 부문별로 압도적 1위 자리가 뚜렷하다.
반면 반도체 패키징은 그동안 전공정에 비해 주목도가 떨어졌다. 전공정에서 '나노미터(㎚·10억분의 1m)'와 '수율(결함 없는 합격품 비율)' 등 첨단 기술 경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반도체 기술 혁신이 정점에 달하면서 한계에 다다랐고, 동시에 고성능 반도체에 대한 수요가 커지면서 패키징 기술도 필수가 됐기 때문이다. 이제는 패키징 능력이 반도체의 성능을 좌우하는 실정이다.
더구나 글로벌 패키징 시장의 절대 강자는 없다. 1위인 대만의 ASE가 30%, 2위인 미국의 앰코가 15% 등의 글로벌 점유율을 보인다.
물론 패키징 시장의 진입 장벽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도체가 '산업의 쌀'로 불리는 상황에서 메모리나 파운드리와 달리 패키징은 아직 시장의 압도적인 1위가 없고, 시장이 성장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는 글로벌 패키징 시장이 2025년 649억 달러(약 85조 원) 규모가 될 것으로 내다본다.
패키징이 뭐길래?…건축 '용적률'과 비슷
하나의 패키지에 여러 개의 반도체를 쌓는 '수직 적층' 방식이 있고, 수평으로 붙여 넣는 방식이 있다. 수평으로 넣으면 패키지 크기가 커지기 때문에 수직 적층이 대세다.
건축에서 용적률이 높을수록 고층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하게 수직으로 반도체를 쌓을수록 용량이 늘어나고 전기적 신호 전달 경로가 짧아져 유리하다.
하지만 패키지 자체의 두께가 늘어나면 안 된다. 따라서 반도체의 두께를 얇게 만들어야 한다. 이는 반도체 생산의 난도가 높아진다. 얇을수록 생산 과정에서 반도체가 물리적인 충격에 약해지기 때문이다.
또 패키징 테스트 때 수직으로 쌓은 반도체 중 한 개만 불량이고 다른 반도체들은 양품이더라도 전체 패키지를 버려야 한다. 전체 수율(결함이 없는 합격품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패키징 기술이 반도체의 수율과 성능에 큰 역할을 한다.
美日도 삼성‧SK하이닉스도 '첨단 패키징' 주목
이처럼 반도체 패키징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면서 미국과 일본은 국가적 관심을 쏟고 있다.
팹리스 강국인 미국은 반도체지원법을 앞세워 반도체 패권을 노골화하면서 파운드리 생산 기지도 빨아들이는 모양새다. 전공정뿐만 아니라 후공정에 대한 관심도 숨기지 않고 있다.
미국 상무부는 지난 2월 28일(현지시간) 반도체지원법상 보조금의 세부 지원계획 공고를 통해 '공급망 집중'이라는 위험을 완화하기 위해 생산 시설에 대한 투자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첨단 패키지' 부문을 콕 집어 "이 부문에 대한 세계 최고의 기술과 생산 능력을 갖추는 것이 미국의 미래 경쟁력 강화를 위한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미국과 협정으로 반도체 산업이 몰락한 일본도 최근 절치부심(切齒腐心)하고 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반도체 패키징 부문에 대해 "일본이 반도체에서 이길 수 있는 마지막 분야"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일본은 패키징 기판 세계 1위인 이비덴과 2위 신코를 보유했다. 이비덴과 신코는 서버용 패키징에서 반도체를 20개를 쌓는 기술에서 경쟁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TSMC가 일본에 투자를 결정한 배경도 이들 기업의 존재가 한몫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우리나라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첨단 패키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이 지난달 17일 천안캠퍼스와 온양캠퍼스를 찾았다. 이곳의 첨단 패키징 기술이 적용된 반도체 생산 라인을 살피고 경영진과 차세대 반도체 패키징 경쟁력 및 R&D(연구개발) 역량 등을 논의했다.
특히 이 회장은 이 자리에서 인재 양성과 미래 기술 투자에 대해 "조금도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패키징 기술의 중요성과 투자를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SK하이닉스 또한 미국에 150억 달러를 투자해 첨단 패키징과 R&D 센터를 건설한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이 지난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백악관 화상 면담에서 직접 투자 계획을 밝혔다.
한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공정 하나하나가 중요해지고 있다"면서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반도체가 국가 안보 산업으로써 중요성이 커지는 만큼 우리나라도 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