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전쟁범죄'를 왜 韓기업이 배상?…'대법원 판결' 무력화 우려

尹정부 '강제징용 배상안' 발표
한국 정부가 세운 재단이 배상금 마련해 지급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강제 조항 없어
日 기업에 손해배상 명령한 대법원 판결과 충돌
日 빠지고, 대법과 충돌하는 배상안에 진통 불가피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가 6일 내놓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안의 핵심은 강제징용 범죄의 주체인 일본이 아닌 한국 정부가 세운 재단이 배상금을 만들어 지급하는 것이다. 일본 기업의 참여를 강제하는 조항도 없다.

그동안 일본 기업들은 강제징용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동시에 한국이 주장하는 손해배상에 대해서도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이미 해결된 문제라며 강제징용 피해자 개인들에 대한 손해배상을 거부해왔다.

이에 대법원은 지난 2018년 '강제징용은 명백한 사실이자 범죄이고, 피해자 개인들의 손해배상 청구권도 소멸되지 않았다'라며 일본 기업들이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지만, 윤석열 정부의 결정으로 우리나라 최고 법원인 대법원의 판결은 사실상 무력화됐다.

범죄 저지른 日 아닌 韓이 배상… 대법원 판결 무력화


박진 외교부 장관이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배상 해법을 발표하는 모습. 황진환 기자

7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정부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 재단'을 통해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박진 외교부장관은 6일 기자회견을 열고 "2018년 대법원의 확정 판결 원고분들(강제징용 피해자)께 판결금 및 지연이자를 지급할 예정"이라며 "재단의 재원과 관련해선 민간의 자발적 기여 등을 통해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즉, 일본 기업의 참여는 강제되지 않았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은 한국과 일본이 수십 년 간 평행선을 달려온 문제였다.

일본은 그동안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은 1965년에 맺어진 '한일 청구권 협정'을 통해 끝났다고 주장해왔다. 일본은 강제징용 사실 자체도 인정하지 않고 있어 배상이 아닌 보상이란 단어를 고집하고 있다. 불법행위 자체가 없었으니 배상이 아닌 보상이란 논리인 셈이다. 일본 사법부 역시 그동안 한일 청구권 협정을 근거로 들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낸 손해배상 소송을 모두 패소 처리했다.

대법원 전경. 연합뉴스

하지만 대한민국 대법원은 2012년 5월, 새로운 판단을 내렸다. 명백한 불법행위인 강제징용을 인정하지 않고서 결정한 일본 사법부의 판결을 국내에 적용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2012.05.24 대법원, 일제 강제징용 사건 손해배상 선고 中
"민사소송법 제217조 제3호는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 질서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외국 판결 승인 요건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중략)

"일본 판결의 이유에는 일본의 한반도와 한국인에 대한 식민 지배가 합법적이라는 규범적 인식을 전제로 하고, 일제의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을 한반도와 원고 등에게 적용하는 것도 유효하다고 평가한 부분이 포함돼 있습니다"

"일본 판결 이유는 일제 강점기의 강제 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판결 이유가 담긴 일본 판결을 그대로 승인하는 결과는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 질서에 위반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일본 판결을 승인해 그 효력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대법원은 이어 한일 청구권 협정 당시 일본이 강제징용 등에 대한 법적 배상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해당 협정에 개인들의 손해에 대한 배상이 포함된 것으로 볼 수도 없다고 판결했다.

2012.05.24 대법원, 일제 강제징용 사건 손해배상 선고 中
"청구권 협정의 협상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 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했고, 이에 따라 한일 양국의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국가 권력이 관여한 반(反)인도적 불법 행위나 식민 지배와 직결된 불법 행위로 인한 손해 배상 청구권이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됐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원고 등의 손해 배상 청구권도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도 포기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상당합니다"

대법원은 이러한 이유로 원고(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며 사건을 파기 환송했고, 사건을 돌려받은 서울고법도 2013년 7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강제징용 범죄 당사자인 신일철주금·미쓰비시 등이 재상고했지만 대법원은 각각 2018년 10월과 11월, 일본 기업들이 피해자들에게 1억 원씩 배상하라며 피해자 승소로 판결을 확정했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정부 당시 양승태 사법부가 대법원 확정 판결을 차일피일 미루며 그사이 '재판 거래'를 했다는 사법농단 의혹도 불거져 재판이 진행 중인 상황이다. 당시 사법농단 의혹의 수사팀장은 한동훈 현 법무부장관이었다.

일본제철 본사 간판. 연합뉴스

대법원 확정 판결 직후에도 미쓰비시 등이 손해 배상을 미루며 버티기에 들어가자, 법원은 국내에 있는 일본 기업들의 자산에 대해 압류와 매각을 결정했다. 미쓰비시가 지난해 초, 재항고하면서 대법원의 판결을 받게 됐다.

다만 대법원은 판결을 미뤘다. 법조계에선 대법원이 정부가 외교적으로 해결할 시간을 벌어준 것이란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외교부도 대법원에 협상을 위해 판결을 미뤄달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6일 외교부의 발표로 일본 기업에게 손해 배상을 명령한 대법원 판결은 사실상 무력화됐다.

피해자들 반발… 정부 결정에도 논란 불가피

윤석열 정부가 강제징용 배상안을 내놓았지만 진통과 논란은 이제 시작이란 전망이 압도적이다.

일단 피해자들의 반발은 거세다. 범죄 행위 주체인 일본 측의 책임이 사실상 면제된 상황이란 점에서 피해자들이 해당 배상안을 수용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현재 전국 법원에서 진행 중인 강제징용 손해배상 소송도 '불씨'다. 알려진 소송만 총 66건이며 당사자는 1100여 명에 이른다. 대법원이 자신들의 2018년 판결을 뒤집지 않는 한 하급심 법원 상당수도 대법원의 판례에 따라 일본 기업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지울 가능성이 높다. 일본 기업에게 면죄부를 줬다는 평가가 나오는 윤석열 정부의 배상안과 충돌하는 부분이다.
 
현재 대법원 3부가 맡고 있는 미쓰비시의 국내 자산 압류·매각 사건을 두고도 진통이 예상된다.

미쓰비시 등 일본 기업이 2018년 대법원의 판결에도 손해배상을 미루자 법원은 미쓰비시 등의 국내 자산에 대해 압류와 매각을 결정했고, 현재 대법원의 판단이 남은 상황이다. 이 사건의 주심이었던 김재형 전 대법관이 정부에게 외교적 시간을 벌어주며 판결을 보류·퇴임했고, 현재는 윤석열 정부의 첫 임명 대법관인 오석준 대법관이 사건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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