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31년 소송전' 봉합?…갈등 '불씨'는 그대로

박진 외교부 장관이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 배상해법 발표를 마친 뒤 승강기에 오르고 있다. 황진환 기자

정부가 일제 강점기 시절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를 놓고 국내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한 '제3자 변제'라는 해법을 도출했지만 법조계에서는 여전히 갈등이 불씨가 남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가 제시한 해법은 배상 책임이 있는 일본 피고 기업의 참여가 강제되지 않아 이른바 '반쪽' 해결책이라는 지적이다. 이들 일본 기업에 대한 '채권'이 사라져 이를 둘러싼 강제징용 피해자와 국내 재단 사이에 추가 소송전이 불가피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결국 30년 넘게 이어온 강제징용 소송전이 당사자인 일본 기업은 빠진 채 우리끼리의 다툼으로 남을 여지만 높아진 셈이다.


31년 다툰 '소송전'…결국 일본 피고 기업은 '제외'


정부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해 판결금과 지연이자를 지급하겠다는 '제3자 변제'안을 공식화한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센터 모습. 황진환 기자

외교부가 이날 언론에 배포한 설명자료 등에 따르면 강제징용 피해자가 일본 기업을 상대로 처음 소송전에 나선 것은 31년 전 일본에서다.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는 1992년 동료들과 함께 일본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 지부에 처음으로 미쓰비시 중공업(당시 나고야)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하지만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했다.

양 할머니 이후에는 고(故) 여운택·신천수씨가 1997년 일본 오사카 지방재판소에 일본제철(당시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하지만 이들도 2003년 최종 패소했다. 한일 양국이 1965년 맺은 청구권 협정에 의해 개인에게 배상할 책임이 없다는 게 일본 대법원의 판단 이유였다.

일본·한국 소송 연이은 '패소'…2012년 대법원서 '반전'



여씨 등은 2005년 2월 서울중앙지법을 통해 다시 소송전에 나섰다. 이들은 1, 2심에서 패소했지만,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에서 반전을 이끌어냈다. 대법원이 원고 승소 취지로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며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당시 대법원은 "청구권 협정의 협상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 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했고, 이에 따라 한일 양국의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국가 권력이 관여한 반(反)인도적 불법 행위나 식민 지배와 직결된 불법 행위로 인한 손해 배상 청구권이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여씨 등의 손해 배상 청구권도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도 포기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상당하다"고 지적했다.

한일 청구권 협정은 정부 간의 정치적 합의일 뿐, 개인에 대한 손해 배상까지 포함하는 협정이 아니라는 취지다.

여씨 등은 2012년 대법원 파기환송 이후 재상고심을 거쳐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최종 승소 판결을 확정받았다.

2012년 5월 여씨 등에 대한 대법원 판단이 나오자 처음 일본에서 소송을 냈던 양 할머니 등도 같은 해 10월 광주지법에 소송을 내 2018년 11월 최종 일부 승소 확정판결을 받았다. 2012년 대법원이 파기환송한 이후 재상고심을 거쳐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승소 판결을 확정하기까지 6년이 걸린 셈이다.


최종 승소에도 '배상금' 둘러싼 피해자 소송 진행형


황진환 기자

대법원이 2018년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배상금을 인정했지만, 이후에도 배상금을 받기 위한 피해자들의 싸움은 계속됐다.

피해자들은 손해배상 책임이 있는 일본 기업이 배상금 지급을 거부하자 2019년 이들 기업의 국내 자산 매각 등 강제 현금화에 나섰다. 일본 기업의 국내 특허권과 상표권을 압류하고 이를 매각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취지다.

하지만 이 소송은 지난해 8월쯤 선고가 이뤄질 것이라는 법원 안팎의 전망이 나왔지만, 지금까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당시 대법원 선고가 가시화하자 외교부가 일본 기업의 국내 보유 자산 매각에 대한 최종 판단을 미뤄달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했는데 대법원이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외교부의 요청대로 우리 정부에게 시간적 여유와 외교적 해결의 길을 터준 셈인데 결국 국내 재단을 통한 '제3자 변제'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강제징용 피해 배상과 관련한 미쓰비시중공업 자산 매각 명령 사건 등 주심을 맡았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지난해 9월 퇴임한 김재형 대법관은 퇴임사에서 "입법이나 정치의 영역에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한 사안인데도 법원의 문을 두드리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다만 그는 '미쓰비시 관련 결정을 못 하고 떠난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취재진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재단 배상금 반대"…피해자-재단, 법정 공방 '불가피'


박진 외교부 장관이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배상 해법을 발표하고 있다. 이날 정부는 2018년 우리 대법원에서 배상 판결을 확정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대한 배상금을 일본 기업은 빠진 채 국내 기업 등 민간의 자발적 기여로 마련한 돈으로 지급하는 '제3자 변제' 안을 공식 발표했다. 황진환 기자

정부의 해법에도 일부 피해자들과 정부가 만든 재단 사이 법정 공방은 불가피해 보인다. 피해자 측 가운데 일부는 일본 기업의 참여 없는 국내 재단을 통한 배상금 수령에 반대하면서 정부의 해법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정부는 앞으로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측을 개별 접촉해 일본 피고기업 대신 한국 기업의 기부금으로 판결금을 받을 수 있도록 설득해나가겠다는 입장이다. 구체적인 접촉은 재단이 맡게 되며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15명이 받아야 할 배상금 규모는 지연이자까지 약 40억원 규모로 알려졌다.

문제는 반발하는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인정받은 채권이다.

'제3자 변제' 해법에 일본 빠지고 우리끼리 다툴 수도




강제동원 피해 소송 대리인단에서 활동 중인 임재성 변호사는 이날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피해자들이 만약 채권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여전히 집행 시도를 할 수 있다"면서 "아마 한국이 정상회담을 위한 조건으로 동의하지 않는 피해자들도 우리가 다 일괄해서 채권을 소멸시켜 줄 수 있다. 일방적인 공탁을 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이른바 '채권자 동의 없는 채권 소멸'을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는 취지다. 정부가 일본 기업과 채무인수 계약을 맺어 '채권자 동의 없는 채권소멸'을 추진한다면 피해자 쪽에서는 공탁이 유효하지 않다며 법적 대응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는 예기다.

임 변호사는 "지금 집행하는 사건에 공탁서가 들어올 것"이라면서 "채권이 없어졌으니 집행 절차와 기각해 달라는 주장을 하면 그 (채권 소멸을 위한) 공탁이 유효하지 않다고 다퉈볼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서 일본 전범 기업은 빠지고 국내 문제로 전환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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