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美무능, 中묵인, 푸틴이 지른 우크라전 1년…전세계 고통 가중 ②우크라이나 전쟁 후 펼쳐질 '新 국제질서'의 모습은? ③전쟁이 쏘아올린 에너지난·식량 위기, 세계 경제를 흔들다 ④우-러 전쟁 1년에 '한미일 vs 북중러' 구도 강화…우리 부담 커졌다 (계속) |
미중 전략경쟁으로 점차 실체를 드러내던 '신냉전'은 1년 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색채가 분명해졌다. '한미일' 그리고 '북중러', 일각에선 '블루 팀'과 '레드 팀'이라고도 부르는 양 진영의 대결이 21세기 들어 현실화되고 이제는 북한마저 이를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중 양측이 한국에 이른바 '현명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그 신냉전의 최전방에 서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이, 어느 한 쪽에 쏠릴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는 점이다. 군사용어로 '아군'과 '적군'을 각각 의미하는 '블루 팀' 대 '레드 팀'의 단순한 도식이 위험한 이유다.
미국이 직접 병력은 안 보내지만 밀착돼 있던 경제는 '디커플링'
침공 예상 날짜를 미리 언론에 공개하는 등 여러 메시지를 보냈지만 결국 전쟁을 막는 데 실패한 미국은 뒤늦게나마 대량의 무기와 정찰정보 지원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돕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직접 전투병력을 보내 참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냉전의 시작을 알린 한국전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가 양극화되는 과정의 산물이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알아본 미국과 소련은 우리를 각자에게 유리한 최전방 기지로 만들려 했고, 38선의 비극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국경 양쪽에 폴란드와 러시아를 양쪽에 둔 우크라이나가 그 무대가 됐다. 이번 전쟁 또한 일종의 대리전(proxy war)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다만 미국이 직접 전투병력을 보내지 않았다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가장 간단한 이유는 징병제를 유지하며 병력을 어느 정도 '소모품'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던 과거와 달리, 10년 넘게 계속된 '테러와의 전쟁'에서 발생한 인명피해가 재발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의 인명피해는 국내 여론의 악화로 이어지고, 여론의 악화는 국제정치에서의 선택지를 좁히는 경향이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외치는 내치의 연장'이라는 말을 뒷받침하는 사례다.
또다른 이유도 있다. 경제 문제다. 냉전이 시작될 당시와 달리 체제 경쟁에서 소련이 패배하고 세계 경제가 긴밀히 연결되면서 미국과 중국, 미국과 러시아는 서로가 필요해졌다. 쉽게 예를 들어 항공기 제작 등에 쓰이는 티타늄의 최대 생산국은 중국과 러시아로, 미국은 구 소련 시절부터 이를 활발히 수입해 왔다. 중국이 미국에서 가장 많이 수입하는 물품이 다름아닌 반도체다. 중국의 대외무역 수출입 규모 가운데 상위권 3개 국가는 다름아닌 미국, 일본, 그리고 한국이다.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는 최근 발간한 '2023 국제정세전망'에서 "미중 경쟁과 우크라이나 경쟁은 미일과 중러의 경쟁적 연대를 더욱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면서도 "상호의존적 경제 관계와 군비경쟁의 수준 등을 고려할 때 냉전적 관계가 형성될 가능성은 낮다"고 내다봤다.
다만 지난해 10월 7일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이 발표한 '미중 무역전쟁 4년 경과 및 전망' 보고서를 보면 미중 무역규모가 커지더라도 양국의 무역에서 서로가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낮아져, 이른바 디커플링(decoupling, 탈동조화)이 가속화됐다는 평가도 가능한 만큼 조금 더 두고 볼 필요가 있어 보이는 대목이다.
이젠 대놓고 북한 편드는 중러…"집단안보 제대로 작동 못해, 집단방위기구가 득세"
그렇지 않아도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인 만큼 원래 선택지가 그리 많지는 않았는데, 이번에도 신냉전의 최전선 중 한 곳이 됐다.
오히려 냉전 당시에는 중국이 문화대혁명을 겪은 뒤 미중간 이른바 '핑퐁 외교'가 활성화되면서 1979년 전격 수교하기에 이르렀고, 그렇기에 우리도 선택지가 어느 정도 있기는 했다. 그래서 구 소련이 붕괴하고 난 뒤인 1992년 노태우 정부는 당시 '중공'이라 부르던 중화인민공화국과 정식 수교를 맺었고,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대만(당시 '자유중국')과 단교했다. 이는 1990년 한소 수교에 이어 이른바 '북방정책'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록됐다.
그런데 탈냉전 시기가 지나간 지금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1969년 국경분쟁 끝에 무력충돌까지 겪어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중러는 미중 전략경쟁을 계기로 밀착했고, 여기에 북한도 끼어 '북중러'의 구도가 만들어졌다. 2017년 북한의 6차 핵실험과 화성-15형 ICBM 시험발사 당시만 해도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제재에 동참했던 중국과 러시아는 최근 거의 대놓고 북한의 편을 들고 있다.
지난 20일(현지시간) 북한의 ICBM 발사를 이유로 미국 뉴욕에서 열렸던 안보리 회의에서도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한미연합훈련 때문이라면서 대북 결의를 반대했고, 의장성명조차 무산됐다. 토머스-그린필드 주유엔 대사가 11개국을 대표해 북한을 규탄하고 공동 대응을 촉구하는 장외성명을 기자들 앞에서 읽은 것이 전부였다.
주오사카 총영사를 지낸 북한대학원대 조성렬 초빙교수는 22일 열린 '세계안보와 한일관계 개선 및 제언' 세미나에서 "이번처럼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이 개입된 전쟁들이 있기 때문에 UN의 집단안보체제(collective security system)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다"며 "NATO, 쿼드, AUKUS, 상하이협력기구(SCO),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 회의(CICA) 등 집단안보와 대립적인 집단방위(collective defense system)기구들이 득세하고 있고, 한국은 지정학 리스크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북한 또한 지난 1월 27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명의로 "미국이야말로 러시아의 전략적 안전에 심각한 위협과 도전을 조성하고 지역정세를 오늘과 같은 험악한 지경에로 몰아넣고 있는 장본인이다"며 "러시아의 안전 우려를 전면무시하고 우크라이나에 천문학적 액수의 군사장비들을 넘겨주면서 세계의 평화와 지역의 안전을 파괴하고 있는 미국과 서방나라들은 주권국가들의 자위권에 대하여 시비할 자격이나 그 어떤 명분도 없다"며 공개 지지 선언을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1일(현지시간) 국정연설에서 과거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신 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 참여 중단을 선언했다. 2010년에 체결됐던 이 협정은 미국과 러시아 양국이 보유한 핵탄두(1550개)와 운송수단(700개)을 감축하고 쌍방이 핵시설을 주기적으로 사찰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그런데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이러한 조치가 2019년 미국이 사거리 5500km까지의 미사일 배치를 제한하는 중거리 핵전력 조약(INF)을 탈퇴했기 때문이라는 입장이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 시절 미국이 이 조약을 먼저 탈퇴한 것은 사실이다. 러시아가 조약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는 이유를 댔다.
그 결과 2021년 5월 한미정상회담에서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이 완전히 없어져 한국이 사거리에 관계없이 탄도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게 됐고, 일본은 한 술 더 떠 '반격 능력'을 위해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보유하겠다는 국가안보전략을 공식화했다. 물론 이 둘 모두 자국의 이익을 위한 미국의 세계전략에 속해 있다. 중국은 반발할 수밖에 없고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러한 대립구도는 주변국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최전선에 서 있는 남북한에 일정한 선택을 강제하거나, 한국에 피해를 입힐 수 있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지적이다.
한국에 "살상 무기 달라"는 미-우크라…러시아와의 '선' 지켜야 하는 신세
우크라이나는 물론 미국 또한 한국에 우크라이나를 좀더 적극적으로 도와 달라는 요청을 보내고 있다. 이는 곧 살상 무기 지원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외교부의 '2021 러시아 개황'에 따르면 러시아는 코로나19로 침체됐던 2020년에도 한국과 223억 달러 규모를 주고받아, 한국의 교역 대상국 가운데 12위를 기록했다. 이번 전쟁으로 국제사회가 우크라이나에 각종 지원을 하고는 있지만, 한국이 무기 지원만은 하지 않고 있는 가장 간단한 이유가 이것이다. 한국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에 대입해 보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최근에 다소 빛이 바래긴 했지만 이른바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이라는 말이 나오게 한 우리의 현 주소다.
이런 상황에서 살상 무기 지원은 결과적으로 북중러에 한국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는 균형 상태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 한국 정부도 이를 알기 때문에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느라 떨어져 가고 있는 탄약 재고를 보충하기 위해 155mm 포탄을 수출하거나, 폴란드에 K-2 전차, K-9 자주포, FA-50 경공격기를 수출하는 정도로 선을 지키고 있다.
또 이번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2013-14년 유로마이단과 돈바스 전쟁 이후 러시아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안보 위협으로 인한 NATO 가입 추진, 그리고 여기에 역으로 안보 위협을 느낀 러시아의 인식으로 지목되는 만큼 한국 입장에선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해양전략연구소(KIMS)는 지난해 7월 펴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배경·전개·시사점'에서 "우크라이나의 포로셴코와 젤렌스키 정권이 보여주듯 미러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직접 충돌하고 민감하게 교차하는 지정학적 공간인 우크라이나에서 외교 노선의 유연성과 실용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대안 없는 양자택일은 결국 스스로의 대외정치적 입지를 좁혔고, 국익을 침식시켰으며 심각한 안보 위기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외부에의 의존은 안보력과 외교력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자조·공조적 외교안보 역량 강화의 필요성이 제기된다"며 "명분이나 실리도 없이 가볍게 강대국들에 말려들지(연루, entrapment) 않도록 보편적 원칙을 수립해 외교안보 정책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런 점에서 지난 2006년 고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50차 상임위원회 당시 연설은 17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완전하게 대등한 외교는 할 수 없습니다. 미국은 초강대국입니다. 미국의 힘에 상응하는, 미국의 세계적인 영향력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 줘야 됩니다. 동네 힘센 사람이, 돈 많은 사람이 '동네 길 이렇게 고칩시다, 둑 이렇게 고칩시다. 산에 나무 심읍시다.' 하면은 어지간한 사람은 따라가는 거지요.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 그것을 거역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자주 국가, 독립 국가로서의 체면은 유지해야 될 거 아니겠습니까? 때때로 한 번씩 배짱이라도 내보일 수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