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의 어느 가을날, CBS 사회부 사건팀은 '저출산의 늪' 기획 보도 4꼭지를 연속 보도합니다. 청년들이 출산을 미루는 이유와 어렵게 아이를 가져도 직장에서 받았던 따가운 눈총들, 보육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엄마들 사연까지 저출산의 '현실'을 듣고 가감 없이 전달했습니다.
이 기획 마지막 편에서 취재진은 '저출산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단순히 현금성 살포의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는 출산율을 끌어올릴 수 없고 상황만 악화시킨다는 거죠.
육아정책연구소 권미경 연구실장의 입을 빌려 전달하자면, "외국에서 성공한 정책이라며 무작정 들여올 것이 아니라 저출산 문제가 사회 총체적인 문제라는 인식 하에 접근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때 권 실장이 이런 이야기를 취재진에게 했습니다.
"학부모들은 아동 수당이 늘었으면 좋겠다, 양육 수당이 늘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래서 '수당을 늘려주면 더 아이를 낳을 거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라고 합니다."
정책이 없어서 아이를 낳지 않는 게 아니라 출산을 삶의 우선순위에 둘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문제라는 해석입니다.
현금 살포만으로는 얽히고 설킨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7년 전 CBS 취재진의 '예언'이 맞아떨어진 셈입니다. 양육수당, 아동수당으로 지원되는 현금들, 출산지원금 등 1회성 혹은 다회성 지원과 같은 저출산 정책 '씨앗'들이 땅에서 튼튼하게 뿌리를 내려 출산율 상승이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공중으로 흩날려 날아가버린 거죠.
수백조의 예산을 쓰고도 현실을 전혀 개선시키지 못한 속 사정을 조금 더 들여다보겠습니다.
지방엔 '먹이'가 없고 서울에는 '둥지'가 없는 현실
지난 22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제1차 미래와 인구전략 포럼'이 열렸는데요, 청년들이 왜 출산을 기피하고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하는지를 주제로 한 토크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이날 토론자로 참석한 동아일보 정책사회부 김소영 기자가 아주 인상 깊은 이야기를 남겼는데요, 김 기자는 댓글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지방은 먹이가 없고, 서울은 둥지가 없다는 기사의 댓글이 현재 청년들이 출산을 왜 기피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방은 일자리, 즉 먹이가 없어서 살 수 없고, 서울은 둥지가 없어서 결혼과 출산은 꿈도 못 꾼다는 비유가 지금 우리나라 청년의 삶을 잘 말해주고 있어요."
이미 수도권은 인구와 자원의 블랙홀이 된 상태입니다. 지난해 말 기준 전체 인구 가운데 절반이 넘는 50.3%(2605만명)가 수도권에 모여 살고 있습니다. 수도권 쏠림 현장의 가장 큰 이유는 일자리 때문인데요, 전국 1천대 기업 중 서울에 과반이 넘는 529곳이 몰려 있습니다.
반면 지방의 인프라는 점점 쪼그라들어 수도권과 지방의 양극화를 넘어 사실상 '일극화'되는 양상입니다.
모든 자원이 몰려 있는 수도권에서의 삶은 괜찮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청년들이 수도권이 몰리면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주택 등 생활 비용이 늘면서 결혼을 연기하고 출산까지 포기하는 도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국토연구원은 지난 9월 주택가격이 1% 오르면 합계출산율은 약 0.014명 떨어진다는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집값이 5% 상승한다 하면 합계출산율은 0.07명 하락하게 되는 겁니다. 집값이 가장 비싼 도시 서울의 출산율이 이 공식을 뒷받침합니다. 이번주 발표된 합계출산율에서 시도별 출산율 중 서울은 0.59명으로 가장 낮은 출산율을 기록했습니다.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 시간이야"
여러 고비를 넘어 어렵사리 결혼해 아이를 갖게 된다고 해도 이번엔 양육과 보육이라는 커다란 산을 만나게 됩니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일터에 복귀한 엄마 혹은 아빠에게 가장 필요한 건 뭘까요? 정답은 '부모님' 입니다. 부모님은 이모님으로 대체할 수 있는데요, 오후 6~7시까지 머물 수 있는 직장 어린이집을 제외하고는 보통 3~4시 사이에 어린이집 하원이 이뤄집니다.
오후 3시는 엄마 아빠가 한창 열을 올려 일할 시간이죠. 재택이 아니고서야 아이를 데리러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양가 부모님에게 부탁을 드리거나 이모님(하원 도우미)를 고용해 아이를 맡기죠.
이모님은 엄마, 아빠가 퇴근하는 7시까지 아이를 돌봐주십니다. 가격은 조건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모 기업에 다니며 4살 아들의 하원을 이모님께 부탁하고 있는 지인의 사례를 전하자면 한 달에 고정급 120만원을 이모님 '월급'으로 지급한다고 합니다.
청소나 저녁 준비 등 집안일은 일체 하지 않고 아이만 돌봐주는 조건으로, 휴일이나 명절이 포함돼 있어도 급여는 120만원 고정이라고 합니다. 너무 비싼 것 아니냐는 주위 우려에 그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안 드리면 더 좋은 조건이 들어왔을 때 가신단 말이야."
더 좋은 조건에 '스카웃' 되면 아이를 당장 하원시켜야 하는 엄마 아빠는 말 그대로 멘붕입니다. 그래서 조금 무리해서라도 이모님을 붙잡아 두려 한다는 겁니다.
아이를 두고 일터에서 일하는 시간, 워킹맘들은 "시간을 돈으로 산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내가 아이를 돌봐주지 못하는 '시간'을 이모님을 사서 대체한다고요. 아이가 두 명이면 비용도 두 배 가까이 늘어나겠죠. 시터비를 내려고 일을 하는건지, 일을 하려고 시터비를 내는건지 '현타'가 오는 순간도 많습니다.
해가 아직 하늘에 떠 있는 오후 4시, 아이 손 잡고 유치원에서 나와 놀이터도 가고 아이스크림도 하나 물고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는 평범한 일상. 미드나 영화에서 보는 그 장면이 왜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안 될까요?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월평균 근로시간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최상위권을 차지해 왔습니다. 오후 7시 전후 퇴근, 회식에 야근까지… 주 52시간제가 도입됐지만 지난 2021년 근로시간은 전년 대비 0.6시간 길어졌습니다.
현재 윤석열 정부는 근로시간 제도 개편을 중심으로 한 노동개혁을 추진중입니다. 현행 주 52시간제를 최대 주 69시간으로 늘린다는 방침입니다. 1주일 기준 12시간까지 허용하는 연장근로를 월 단위 또는 분기, 반년 등으로 다양하게 적용하는 방안입니다.
일부 사업장에서는 52시간제가 생산성을 낮춘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엄마 아빠는 근무시간이 늘어난다고 하면 말 그대로 앞이 깜깜해질 겁니다. 우선 시터의 비용이 더 늘어나겠죠. 아이에게 미안하고 죄인된 마음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일을 해도 돈을 모으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둘째를 생각했던 마음은 무 자르듯이 단칼에 잘리고 말 겁니다.
정부는 돌봄서비스를 확대하겠다고 합니다. 정작 대상자인 엄마, 아빠들은 심드렁한 반응입니다. 아동학대 이슈로 내 아이를 믿고 맡기기 어려운데다 차라리 그 시간에 학원 '뺑뺑이'를 선택하는 엄마들이 더 많죠.
근로 시간을 늘리고 돌봄 서비스를 확대하면, 신혼부부들이 아이를 낳게 될까요?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 아빠들이 둘째, 셋째를 계획할 수 있을까요?
앞서 말했듯, 저출산 문제는 사회 '구조'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방법이 먹혀들지 않는다면, 전혀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 보면 어떨까요?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보육센터를 더 건립하겠다'가 아니라 엄마 아빠가 직접 내 아이를 챙길 수 있는 '시간'을 준다고요. 오후 4시에 퇴근하는 아빠, 5시면 얼굴을 볼 수 있는 엄마는 이 나라에서 정말 불가능한 걸까요?
접근 방식을 바꾼다면 지금까지 꽉 막혔던 복잡한 저출산 문제 물꼬가 조금은 풀리지 않을까요? 양육수당 '현금'보다 귀한 게 부모들에게는 돈 주고 사는 '시간'임을 정부가 알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