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의 운명, 자살을 넘어선 운명''

"홍위병이 30분만 늦게 왔다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ㅎㅎ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케 한다. 고인의 죽음을 접하고 퍼뜩 스쳐간 생각은 그의 국회의원직 사퇴 파동이다. 1989년 봄, 5공 청문회가 여당의 일방적인 불참선언으로 파국을 맞게 되자, 국회의원 노무현은 무기력과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의원직 사퇴서를 낸 적이 있다.

그는 주변의 강력한 권유로 사퇴를 번복하면서 당시 심경을 이렇게 적고 있다. ''''참으로 고통스럽고 창피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부끄러웠던 순간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 겪어 보는 것이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사퇴번복 이유를 묻는 기자들에게 그가 한 말이라곤 이것뿐이었다. ''''변명할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로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어느 잔인한 봄날''''이라는 소제목의 이 글은 이렇게 맺고 있다.

''''어느 잔인한 봄날에 벌어졌던 나의 의원직 사퇴 파동은 이렇듯 봄바람처럼 해프닝으로 지나가 버렸지만, 나의 자존심을 할퀸 상처는 여전히 깊게 남아 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그 상처 자국을 어루만지며 고뇌한다. 과연 정치인이 해야 할 진정한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지를......'''' 그로부터 20년 세월이 지난 어느 봄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세상 사람들과의 이별을 선택함으로써, 살아있는 자들에게 ''''가장 비통한 봄날''''을 안겨주고 떠난다.


고인이 남긴 유서에는 자책과 미안함, 두려움과 암담함으로 불면의 밤을 보낸, 고통의 흔적이 절절하게 배어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부끄러워할 줄 알고, 자존심을 지킬 줄 알고, 정치인으로서 역할과 책임에 대해 고뇌했던 노무현. 그는 검찰의 비자금 수사로 인해 자신이 소중히 여겼던 가치들이 치명타를 입게 되자 마지막 ''''자존''''의 길을 택하고 만다.

◈ ''항우의 자살'' 다룬 곽말약의 <역사소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항우''''와 중국의 원로학자 ''''계선림''''을 떠오르게 한다. 항우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면, 계선림은 중국문화대혁명 때 자살하기 직전에 우연한 사건으로 자살의 위기를 벗어난 인물이다.

사마천의 <사기본기>중 ''''항우본기''''의 한 대목을 보자. 초나라 왕 항우가 한나라 군대 5,000명에게 쫓기는 상황이다. 항우 곁에는 기병 25명만이 남아있었다. [이 때 항왕은 동쪽으로 오강을 건너려고 했다.

오강의 정장이 배를 강 언덕에 대고 기다리다가 항왕에게 말했다. '''' 강동이 비록 작지만 땅이 사방 1,000리이며 백성들의 수가 수십만이니, 왕이 되기에 족합니다. 대왕께서는 서둘러 건너십시오. 지금 오직 신에게만 배가 있어 한나라 군대가 도착해도 건널 수 없습니다.'''' 항왕이 웃으며 말했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건너겠는가! 또한 나 항적이 강동의 젊은이 8,000여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다가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거늘, 설사 강동의 부모와 형제들이 불쌍히 여겨 나를 왕으로 삼아준다고 해도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보겠는가? 설령 그들이 말하지 않는다 해도 나 자신이 마음에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는가?''''

항우는 기병들에게 모두 말에서 내려 걷게 하고 (자신은) 짧은 무기만을 들고 싸움을 벌였다. 항우 혼자서 죽인 한나라 군대가 수백 명이었다. 항왕의 몸 또한 10여 군데 부상을 입었다. 항왕은 스스로 목을 찔러서 죽었다.

곽말약의 <역사소품>중 ''''항우의 자살''''편에는 오강에서 정장이 마지막으로 항우에게 배에 탈 것을 권고하는 대목이 나온다. ''''대왕님, 당신의 온정 깊은 마음은 참으로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족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 그런 감상에 도취해 있을 때가 아닙니다.

''''하늘의 도는 먼데 있고, 사람의 도는 가까운데 있습니다.''''라고 옛 사람들이 말해왔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도를 다한 다음에 하늘의 도에 우리의 운명을 맡겨야 합니다. 당신이 지금 하신 이러한 어지신 마음은 이후 천하를 제패하신 다음에 정직정명(正直正銘)의 거울로 삼으시어 천하의 백성을 구하는데 써주십시오. 지금은 먼저 수화(水火)의 고통에 빠져 있는 천하의 어지러움을 당신의 능력으로 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구하신 다음에 이들 백성들을 도와주셔야 합니다. 하늘은 말할 것도 없이 모든 사람들은 당신을 도울 것이옵니다. 강동의 여러 사람들도 지원과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다시 재기하신다 해도 결코 늦은 것이 아닙니다.......''''

항왕을 따라 죽으려고 칼을 빼든 신하 종리매. 정장은 그의 손을 가로막으며 권고하였다.''''종리매 장군님! 당신까지도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천하의 모든 사람들은 여전히 재난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구하려고 하는 정신을 가진 무인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책임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무책임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 알겠습니까? 항왕께서 최후까지 깨닫지 못한 것이 바로 이 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또 죽음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건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활용이란 자기 하나만을 영웅으로 만드는 데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철두철미하게 ''''자기''''만을 위했던 것입니다. 우리 같은 천하의 백성들은 생각하지 않고, 또 우리 전 중국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분이 한 실패의 뒤를 당신은 따라 걷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편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도도히 흐르는 장강은 여전히 장중한 소리를 내며 그가 천고를 흐르면서 지켜온 교훈을 인간에게 권고하고 있었다. ''''너희들의 승리는 극히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곧 태양에 정복되어 모든 것이 녹아서 내게로 올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 . 너희들은 누구든지 또 얼마든지 더러운 것일지라도 함께 묻어서 내게로 오라. 나는 모든 너희들을 받아들이겠노라. 너희들이 지금 갖고 있는 그 교만한 마음과 자신의 지위만을 굳히려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을 내버려라. 빨리 오너라. 나와 함께 생명의 송가를 부르도록 하자.'''' 정장이 버린 작은 배는 장강에게 보내는 박수 소리와도 같이 물결 소리에 맞춰 무심히 흔들거리고 있었다.]

◈문화대혁명 때 자살을 위기를 넘어선 지식인, 계선림의 <우붕잡억>

''''문화대혁명에 대한 한 지식인의 회고''''라는 부제를 단 <우붕잡억>은 계선림의 회고록이다. 올해 98세의 원로학자인 계선림은 문화대혁명 때 반혁명자, 반동지식인으로 몰려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이다. 우붕이란 문화대혁명 때 지식인을 임시 수용했던 헛간이다. 1967겨울부터 1968년 봄까지 비판투쟁이 고조되던 때, 55-56세의 계선림은 북경대학 동방학부 주임을 박탈당하고 비판투쟁에 끌려 다니며 온갖 고초를 겪는다.

그는 <우붕잡억>의 ''''사지로 내몰린 자의 유일한 권력, 자살'''' 편에서 당시의 고통을 이렇게 회고한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비판투쟁 장면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눈앞이 칠흑같이 캄캄해졌다. 나는 어디로 가고 누구를 따라야 하는가? 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 길은 단지 두 개 뿐이었다. 모든 것을 참고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을 떠나 이 세상을 떠나든가.첫 번째 길은 나로서는 절대 불가능했으므로, 두 번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어 보였다.더구나 이 길을 걷는 사람은 이유야 무엇이든 간에 모두 ''''스스로 인민과의 관계를 끊었다''''는 치명적 약점을 잡힌다. 빠져나갈 길 없는 사지로 내몰린 사람에게 남겨진 유일한 권력은 바로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일뿐이다.

만약 이것이 스스로 인민과의 관계를 끊는 거라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 사지로 몰려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는데, 무엇을 무서워하겠는가? ''''죽고 나면 누가 시비를 따질까?'''' 내가 눈을 감으면, 세상 사람들이 가서 제멋대로 지껄이겠지. 결단을 내리자 마음은 오히려 편안해지고 이상하리만큼 고요하고 맑아졌다.나는 차분히, 분명히, 과학적으로 이 결정을 실현시킬 방법과 절차를 생각했다. 아주 많이, 아주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아주 주도면밀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는 자살방법과 시기, 장소를 결정했다. 모든 것이 준비된 채 내가 발걸음을 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아주 거칠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홍위병들이 계선림을 비판투쟁에 끌고 가기 위해 들이닥친 것이다.

홍위병에게 끌려가 온몸을 두들겨 맞으며 혹독한 비판투쟁을 겪은 계선림은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 [이런 몰골로 비칠비칠 절뚝거리며 겨우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내 모습을 본 두 여인들은 놀랐지만, 순간 그 놀라움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어쨌든 내가 살아서 돌아왔기 때문이다.이것은 내가 50여 년을 살아오면서 생전 처음 겪은 비판투쟁이었다. 너무 놀라 넋이 달아날 정도였으니,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으리라. 그것은 인간의 잔혹한 본성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아슬아슬한 위기의 순간에 내 목숨을 구해준 셈이었다.''''이처럼 끔찍한 비판투쟁도 알고 보니 참을 수 있는 거구나!'''' ''''이번 투쟁도 넘겼는데, 이후에 또 뭐가 두렵겠어? 그래도 살고 봐야지!'''' 순간, 나는 밀려드는 두려움에 뒷골이 서늘해졌다. 홍위병이 30분만 늦게 왔다면, 나는 뒷 담장을 넘어 원명원으로 달려가 수면제를 먹고 죽었을 것이다.]

계선림은 ''''우붕''''의 수감생활 중에도 방대한 양의 인도고대서사시 <라마야나>를 번역하기에 이른다. 그는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복권이 되어 1978년(67세)에 북경대학 부총장과 제 5회 전국정치협상위원이 되었고, 1983년(72세)에 제 6회 전국인민대표회의 상임위원과 중국언어학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수많은 단체를 이끌었다.

저서로는 <인도고대 언어논문집>,<라마야나 연구>,<대당서역기교주> 등 500여 종이 넘으며, 중국 도서상, 국가도서상, 루쉰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국내에 번역된 저서로는 <우붕잡억>과 올해 2월 출간된 <다 지나간다>가 있다. 그가 50대 중반에 생을 마감했다면 이런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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