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영 감독에게 일제강점기는 역설적으로 '찬란함'을 담은 시대다. 누군가는 비극의 역사라고, 실패의 역사라고 하지만 그 시대 한가운데에 놓인 채 투쟁한 이들의 처절한 삶은 오히려 찬란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빛나는 이들이 만든 길이었다. 그리고 그 길을 이어받아 싸워온 이들이 있기에 지금에 이르렀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유령'은 항일단체인 흑색단이 도처에 심어 놓은 스파이를 부르는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유령'은 1933년 경성, 일제의 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까지 잠입했다. 이해영 감독은 일제강점기를 장르 안으로 끌고 와 독립투사의 희생을 기억하는 동시에 그들이 어떤 탄압을 어떻게 돌파하며 활약했을지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렇게 '유령'은 유령의 신임 총독 암살 작전 시도와 실패로 시작해 목숨을 바쳐서라도 임무를 성공시켜야 하는 유령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첩보 액션으로 나아간다.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이해영 감독은 '유령'을 통해 어떻게 시대의 찬란함을 담아냈는지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줬다.
일제강점기, 독립투사가 보여준 찬란함
▷ 어떻게 '유령'의 각본과 연출을 맡게 됐는지 그 시작이 궁금하다.
이해영 감독(이하 이) : 처음 제안을 받고 고민을 오래 했다. 원작인 마이지아 작가의 '풍성'(風聲)은 밀실 추리극 장르에 충실한 소설이었다. 유령이 누군지 궁금하게 만들고 추리해가는 과정이 중요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오래 고민했지만, 못하겠더라. 재밌게 이야기를 쓸 수 있겠다는 도식화가 안 됐다. 그래서 거절했다.
그런데 막상 거절하고 나니 거리감이 생기면서 객관적으로 보게 됐다. 왜 못하겠다고 생각했을까 곱씹어 봤더니 결국 밀실 추리극이라는 게 부담이었던 거 같았다. 추리를 배제한 채 시작해보면 어떨까 생각했고, 유령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게 아니라 유령의 이야기로 시작하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에 박차경(이하늬)이란 인물을 앞에 두게 됐다. 그렇게 장르는 밀실 추리극이 아닌 스파이 장르로 시작해서 중반 이후로 액션 장르로 변모하도록 구상하게 됐다.
▷ 영화의 미장센이 굉장히 감각적이고 독특하다. 감독이 생각하는 일제강점기는 어떤 시대였기에 이런 분위기로 연출했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이 : 이야기를 구성한 후 독립운동가에 관련한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하면서 내가 받았던 느낌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찬란함'이다. 투쟁, 희생, 치열했던 삶 자체가 정말 찬란했다고 느꼈다. 가슴이 막 타오르듯 뜨거워졌던 느낌을 메시지로서가 아니라 뉘앙스와 분위기로 관객들께 고스란히 전달해드리고 싶었다. 그 시대의 공기가 얼마나 찬란했고, 그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투쟁을 했는지 영화적인 화법으로 보여드리기 위해 신경 썼다.
▷ 정확히 '찬란함'이란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그 찬란함을 어떤 식으로 보여주고자 한 건지 조금 더 자세하게 듣고 싶다.
이 : 찬란함이라 표현했는데 사실 일제강점기는 우리에게 승리의 기억, 승리의 역사가 아니다. 영화를 준비하고 이야기를 쓰면서 찬란함을 담고 싶은 마음이 뜨겁다 보니 승리의 순간을 묘사하고 싶었다. 마침내 실패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 속 캐릭터가 자조적으로 너희(조선)가 질 거라고 단언하는 걸 비웃기라도 하듯이 마침내 승리할 것임을 찬란한 느낌으로 묘사하고 싶었다.
그렇게 묘사하는 게 조금 더 영화적으로 그때 우리가 얼마나 뜨겁게 희생했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이라 생각했다. 영화를 보면 처음과 플래시백 장면, 그리고 마지막에 마를렌 디트리히의 음악(*참고: 영화에서는 재즈보컬리스트 문혜원이 독일어로 부른 노래가 삽입됐다)이 나오는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의 노래다. 찬란한 승리에 이르게 했던 첫 감정, 그 감정이 마침내 승리의 기억까지 안겨주는 느낌으로 넣었다.
'유령'을 구성하는 모든 것에 관한 이야기
▷ 영화에 등장하는 극장에 걸려 있는 마를렌 디트리히 주연의 영화 '상하이 익스프레스'(감독 조셉 폰 스턴버그, 1932)가 눈에 띈다.
이 : 난 마를렌 디트리히가 박차경과 닮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유명했던 배우들은 소위 '섹스 심벌'이라 불리며 소비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디트리히는 여성성으로 소구하는 배우가 아니었다. 성별을 초월한 멋짐을 보여준 배우였다. 그 멋짐을 담고 싶다고 생각해 디트리히를 출연시키고 싶었다.
'유령'은 1933년이 배경인데 디트리히 주연의 '상하이 익스프레스'가 32년도 영화라서 시대가 맞는 것도 있었다. 또 '상하이 익스프레스'를 보면 '유령'의 이야기가 닮은 부분이 있다. 그래서 나만 아는 재미겠지만, 액자식 구성 같은 재미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있다. '유령'은 상해 육삼정에서 벌어진 흑색단 의거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상하이 익스프레스'란 제목과 연결되는 재미도 있었다. 실제 상해에서 벌인 의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미수로 끝난 게 아니라 그 정신을 계승해 여성이 계속 싸워 이겨나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에서 시작된 이야기라 상해라는 지명의 연결고리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액션인데, 어떤 식으로 디자인해 나갔나?
이 : 전체적으로 액션이 많이 있는데, 중후반부는 화려하고 영화적인 액션으로 설계했다. 그리고 제일 처음 쥰지(설경구)와 차경이 호텔 방에서 싸우는 장면은 영화적으로 컷을 많이 쪼개거나 컷으로 접근하고 싶지 않고, 두 배우의 물리적인 부딪힘과 신체의 강렬한 격돌 같은 걸 그대로 담고 싶었다. 그래서 사실 무술팀 대역이 많이 해줄 수 없고 배우가 실제로 해야 했다.
계속 두 배우에게나 무술감독님께 성별을 떼면 좋겠다고, 남녀가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여자치고 잘 싸운다' 같은 간섭 없이, 두 사람이 동등하게 동물적으로 팽팽하게 붙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액션도 합을 외웠다기보다 러프한 동선만 잡아서 작업했다. 이하늬 배우가 정말 놀라울 정도의 기량을 발휘해서 진짜 어느 한쪽이 빠지지 않는 팽팽한 대립이 만들어졌다. 두 배우에게 너무 감사하다.
▷ 영화에서 성별을 지운 건 비단 차경과 쥰지의 맞대결 액션 신만이 아닌 것 같다.
이 : 영화 전체에서 성별이 개입되지 않기를 오히려 바랐던 거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남성 여성이란 성별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생기는 위계가 있다. 그게 개입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성별로 읽히지 않는 영화가 되길 바랐다. 단지 누군가가 계속 이어갔던 싸움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 예비 관객들이 '유령'에 보다 제대로 다가가고자 한다면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까?
이 : '유령' 마케팅 속 키워드로 보면 관습적으로 추리극을 떠올리게 된다. 관객들에게 당부드리고 싶은 건 이 영화에서 추리가 배제됐다는 걸 알고 보면 훨씬 더 정확하고 재밌게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거다. 추리를 배제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나중에 놀라움을 줄 수 있다. 그건 추리와 무관하다. 그냥 스파이 액션 장르를 편안하게 따라가시면 된다.
<하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