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영 감독은 '독전'에서 형사 역으로 함께 작업했던 배우 서현우에게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숨어 있는 매력을 발견했다. 바로 '사랑스러움'이다. 이 감독은 복잡한 암호문을 해독할 정도의 엘리트지만 어딘가 인간적인 모습으로 '유령'의 숨구멍 같은 역할을 해야 할 천은호 계장 역에 서현우를 떠올렸다.
자신의 본질적인 사랑스러움을 발견해 준 이 감독과 재회하게 된 서현우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인물들 사이에서, 좋아하는 동료를 걱정하고 두고 온 고양이 때문에 눈물짓는 천은호 계장을 완벽하게 그려냈다.
그런 서현우도 처음 시나리오를 통해 천 계장을 접했을 때는 부담을 느꼈다. 묵직한 분위기의 영화 안에서 자칫 자신의 캐릭터가 균형을 맞추지 못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 속에서 시작한 서현우는 모두의 도움을 받아 천 계장을 표현할 수 있었다. 새로운 깨달음과 함께 말이다.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서현우는 웃으며 그 과정을 복기했다.
서현우가 본 천은호의 위험함과 매력
서현우가 천은호 계장을 본 후 고민이 들었던 지점은 다른 캐릭터와 다른 결에 있었다. 박차경(이하늬), 유리코(박소담), 무라야마 쥰지(설경구), 다카하라 카이토(박해수) 등 다른 캐릭터는 시대적 사명감이 있거나 비장한 인물인데 반해 천 계장은 힘이 잔뜩 들어간 인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마냥 웃기거나 혹은 감초 같은 역할을 했다가는 잘못 풀면 위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감독님과 수위 조절을 엄청 해나갔다. 어떻게 하면 넘치지 않게 작품에 녹아들면서 어떤 작품 속에 군데군데 숨통을 틔우는 포인트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며 인물에 접근했다"고 말했다.
위험할 수 있는 인물임에도 분명 매력적이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도 있었지만, 그만큼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천 계정의 이러한 지점이 보통의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보기 힘든 지점이라 도전정신도 생겼다. 그러면서 천 계장의 삶을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그려나갔다.
"이 사람의 섬세함, 조심스러움 등은 물론 퇴근 후의 삶도 그려지면서 천 계장이 점점 재밌어졌어요. 이 사람은 손은 어떻게 움직일까 생각하다 보니 배가 나와서 배 위에 올려두는 게 편하더라고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손 처리를 했는데, 감독님이 보시고 '바로 그거야'라고 외치셨어요. 그렇게 기본자세에서 출발했어요. 기본자세에서부터 출발해서 점차 캐릭터가 구체화됐고, 언어적인 포인트도 잡히기 시작했죠."
현장에서 천은호 계장을 완성하며 얻은 깨달음
서현우는 평소 캐릭터를 연구할 때 실제 인물들, 예를 들어 공무원을 연기한다면 공무원들의 모든 것을 면밀히 관찰해 캐릭터에 녹여낸다. 그러나 '유령'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이러한 관찰이 불가능했다. 당시 시대상을 공부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거둘 수 없었다. 그럴 때 도움이 됐던 게 바로 '현장'이다.
그는 "분장과 의상의 힘이 굉장히 컸다"며 "대사도 외우고 신에 대한 분석도 끝났지만 어떤 모습이 나올지는 알 수 없어서 현장에서 계속 발견하려 했다. 마냥 옷을 입혀주셔서 감사한 게 아니라 정말 의상 등 하나하나가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천 계장의 옷을 입고 나니 거기서부터 나오는 느낌이 있었다. 천 계장은 암호해독 전문가로서 높은 지적 능력과 인간적인 면을 동시에 지닌 인물이다. 제작진은 댄디한 '모던 보이' 스타일의 수트와 중절모, 안경으로 천 계장의 차림을 완성했다.
꽉 끼는 옷을 입고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표현하려 했다.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 하기보다 천 계장으로서 현장에서 주어진 모든 것에 순응했다. 그때 서현우는 영화라는 것이 절대 혼자서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예전에는 명확히 알지 못했기에 고생하신 스태프에게 감사드린다고 으레 이야기했었죠. 지금은 정확하게 파트별로 스태프분들이 어떻게 배우와 연계되고 피드백을 주는지 잘 알 거 같아요. 감사한 느낌이 굉장히 구체화됐어요. 스태프께서 준비해 주시는 모든 게 캐릭터가 되고, 연기의 일환이라는 걸 알았죠. '유령'을 하면서 이런 사고방식이 많이 바뀌었어요."
"천 계장의 임무를 잘 마쳤다"
흑백의 시대를 감각적인 분위기로 구현해 낸 세트는 물론 천 계장의 의상, 천 계장의 손동작 하나까지 섬세하게 체크하며 함께 논의해 준 이해영 감독 등 모든 사람과 함께 천 계장이란 캐릭터를 구축했다. 이처럼 잘 준비된 현장 덕분에 별다른 애드리브가 필요 없었다. 오히려 애드리브가 불필요했다.
"저도 사실 애드리브가 가능한 역할이라고 하면 천 계장이 가장 유력한 것 같은데, 그게 가장 신기해요. 어떻게 애드리브를 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때 저 스스로가 인정하게 됐어요. 애드리브가 불필요하다, 내게 주어진 대사를 쫀쫀하게 연기하고, 캐릭터성을 발현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이죠."
시나리오부터 현장까지 완벽하게 준비된 '유령'이었지만 배우로서 욕심이나 아쉬움은 없었을까. 박차경, 유리코, 무라야마 쥰지, 다카하라 카이토 등 모든 캐릭터가 멋진 액션 신까지 선보였지만 천 계장은 본격적인 액션 신이 없는 인물이다.
서현우는 "일단은 동료 배우들에게 미안했다"고 말문을 연 뒤 "나도 영화를 통해 처음 봤다. 다들 이렇게까지 고생했구나 싶고, 액션을 정말 타격감 있게 표현해서 너무 놀랐다"며 "배우 개인으로서는 뭔가 힘이 될 수 있었다면 나도 액션을 해야 했는데 싶어서 미안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천 계장으로서는 다행이라는 생각한다"며 웃었다.
"처음 시나리오 받을 때부터 특명이 있었던 거 같아요. 천 계장이 해야 할 몫이 있었던 거죠. 주변에서 천 계장 캐릭터 재밌고 더 나왔어도 좋았을 거 같다고 하시는데, 전 제 임무를 잘 마친 것 같아요. 전반 호텔에서의 일이 정리되고 유령들이 목적을 달성하러 나가는데, 거기서 필요한 역할로서 다한 거 아닌가 싶어요."(웃음)
<하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