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제주 첫 호텔 동양여관…명성 사라진 자리 남은 건 삶 ②개발 광풍에도…제주 일식주택 100년간 서 있는 이유는 ③포구 확장하고 도로 건설…사라지는 제주 어촌 '소통의 빛' ④택지 개발로 사라질 위기 제주 4·3성…주민이 지켜냈다 (계속) |
70여 년 전 제주4·3 당시 수많은 사람이 군경의 총칼 앞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제주 땅 곳곳이 4·3의 아픔이 서려 있다. 최근 도로를 확장하거나 주택을 지으면서 비극의 흔적은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한편 개발 광풍 속에서도 유적지를 지켜내며 4·3을 기억하는 움직임도 있다.
아이들 웃음 사라진 마을…제주 곳곳에 4·3 비극이
지난 2020년 제주4·3연구소가 펴낸 '제주4·3 유적 보고서'에 따르면 도내 4·3유적지는 잃어버린 마을 122곳, 학살터 174곳, 4·3성 109곳, 민간인 수용소 24곳 등 모두 828곳이다. 지역별로 보면 제주시에 499곳이, 서귀포시에 329곳이 있다. 도내 곳곳에 4·3유적이 분포돼 있다.
4·3유적지 중에는 군경 토벌대가 불태워 현재까지도 복구되지 않은 마을인 '잃어버린 마을'이 있다. 1948년 11월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경이 중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당시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다. 주민 전체가 학살당한 곳도 있다.
대표적인 곳은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이다. 당시 130여 가구가 살았던 규모가 큰 마을이었다. '지형이 춤을 추는 어린이를 닮았다'는 데에서 따온 무등이왓은 현재 아이들의 웃음은 사라지고 없다. 집들의 경계였던 돌담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4·3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곳이다.
대부분 사각 형태였으며 모퉁이마다 경비초소가 설치됐다. 성 가운데에는 움막 형태의 주택과 경찰지서가 있었다. 제주시 조천읍 낙선동 4·3성이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돌로 축조된 방호벽과 모서리의 경비초소, 도로에서 진입할 수 있는 출입구의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다.
이밖에 주민을 강제로 수용했던 주정공장, 감자공장, 단추공장 등이 있었으며, 군인과 경찰, 서북청년단이 머문 주둔지, 주민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학살터가 대표적인 4·3 유적지다.
개발 광풍 속 사라지는 기억…"체계적 관리 필요"
다양한 형태로 아픔을 간직한 4·3유적은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특히 최근 제주 도심지가 확대되고 중산간 일대에도 개발붐이 일면서 소실 유적이 크게 늘고 있다.
4·3 주요 유적 중 하나였던 제주시 한림읍 상대리 '뒷골장성'은 개발 열풍에 아예 사라져 버렸다. 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의 경우 토지매입비 일부를 정부로부터 확보해 매입에 나섰지만, 턱없이 낮은 감정평가비로 토지주들이 동의해주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방치되는 유적도 있다. 대표적인 게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동초등학교 옛터'다. 이곳은 악명 높았던 서북청년회 주둔지였다. 이들은 학교 건물에 머물며 숙식을 해결했다. 인근 창고에 붙잡아 온 주민을 가둬두고 고문을 일삼았다. 4·3 당시 이 일대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성산읍 주민 박성오(66)씨는 "어렸을 때 이 학교를 다녔다. 어른들한테 들었는데, 4·3 당시 서북청년단이 모여 살았다고 하더라. 1970년대 학교를 다른 곳으로 옮긴 뒤로는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다. 결국 건물 한 동만 남았다. 원래는 지붕도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고 말했다.
최근 개발 광풍 속에서 사라지는 4·3유적에 대해 사단법인 제주 다크투어 양성주 대표는 "역사적인 장소에 건물이 있으면 그 얘기가 전승이 된다. 건물을 없애면 그 기억도 사라지는 거다. 특히 4·3을 기억할 수 있는 안내판조차 설치되지 않는 곳도 많아 아쉬움이 크다"고 지적했다.
'제주4·3 유적 보고서' 말미에는 "4·3유적의 보존 문제가 중요한 일로 대두됐다. 최고의 보존 방안은 수악주둔소 사례처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 4·3유적에 대해 4·3 관련 단체와 제주도가 중심이 돼 체계적인 관리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제언하고 있다.
택지개발에 사라질 위기에 처한 4·3성 지켜낸 주민들
최근 개발 광풍 속에 4·3유적이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지만, 주민이 직접 나서서 지켜낸 곳이 있다. 제주시 아라동 인다마을에 있는 4·3성이다. 이곳은 4·3 당시 마을이 불타 강제로 이주당한 아라1동‧2동, 오등동 주민 150여 가구가 살았다. 주민들의 고통스런 삶이 담긴 역사적인 장소다.
10살의 나이에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아라동 4·3성에 살았다는 전명종(84) 할아버지는 "주민들이 밭담과 산담에 있던 돌을 가져다가 성을 쌓았다. 억새 풀 덮고 가마니로 문을 만든 움막에 살았다. 먹을 것이 없어서 밀 껍데기로 끼니를 때웠다. 굶어 죽은 사람도 많았다"고 기억했다.
"밤에는 경비초소 8곳마다 여성 4명이 돌아가며 경계를 섰다. 남자들은 죽고 없기 때문이다. 성 밖에 무슨 일이 생기면 성안에 있는 경찰지서로 연결된 밧줄을 흔들었다. 그러면 깡통소리가 '달그락달그락' 하고 났다. 그러면 경찰들이 총을 들고 나와서 밖을 확인했다"고 회상했다.
이곳은 4·3 당시 동서 150m, 남북 200m의 긴 직사각형 형태에 높이는 4m에 달했던 비교적 큰 성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주택‧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며 성벽 20m 길이만 남았다.
김씨는 "당시 '성벽을 없애자'는 의견이 있었다. '후손들이 알아야 할 4·3 역사의 흔적을 지워버리면 안 된다. 지켜야 된다'고 설득했다. 다행히 다른 주민들이 힘을 보태줘서 지켜낼 수 있었다. 4·3성이 아픔을 기억하는 공간만이 아닌 평화와 화합의 상징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의 의지가 담긴 아라동 4·3성을 설명하는 표석에는 다음의 글귀가 적혀 있다. '다시는 이 땅에 4·3과 같은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이 표석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