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연금 개혁에 속도를 내고 있는 가운데 국민연금 기금이 오는 2055년 고갈될 것이라는 당국의 예측이 나왔다. 이는 5년 전 시뮬레이션보다 2년 더 빨라진 결과다. 대내외적으로 악화된 경제 여건보다는 '생산 인구가 줄고, 부양 인구는 느는' 인구 문제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연금특위)의 활동 기한을 감안해 당초 3월로 예정돼있던 재정 추계를 두 달 앞당겨 공개했다.
국민연금 재정추계전문위원회(재정추계위)는 27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제5차 국민연금 재정추계 시산결과를 발표했다. 국민연금 재정계산은 장기적 관점에서 연금의 재정 건전성을 평가하고 발전적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1998년 도입됐다. 정부는 국민연금법에 근거해 2003년부터 5년마다 재정 추계를 도출하고, 이를 반영한 제도 개선방향 등을 담은 종합운영계획을 당해 10월 말까지 국회에 제출해왔다.
지난해 8월 꾸려진 재정추계위는 연금특위 산하 민간자문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예전보다 2개월 이른 시점에 시산결과를 내놓게 됐다고 밝혔다. 민간자문위원회는 이번 시산 결과를 토대로 이달 말까지 자체 개혁안(案)을 구성할 계획이다. 연금특위는 이를 참고해 국민 의견 수렴을 거쳐 오는 4월까지 개혁 초안을 낸다는 방침이다.
5차 추계에 따르면, 현행 제도를 유지한다는 가정 아래 국민연금은 향후 20여 년 간은 지출보다 수입이 많은 구조를 유지하게 된다. 저출산·고령화가 심화되고 경기가 둔화되면서, 18년 후인 2041년부터는 보험료와 기금 투자수익을 합친 총 수입을 지출이 앞서는 수지 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됐다. 기금 소진 시점은 2055년으로 예측됐다.
가장 최근 시산이었던 2018년 4차 추계 당시보다 적자 전환은 1년, 기금 고갈시점은 2년이 더 앞당겨졌다.
적립기금은 적자 발생 직전인 2040년 1755조 원으로 최대치를 기록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규모 역시 4차 계산 때(1778조 원)보다 23조 원 가량 줄었다.
재정추계위는 총 16번의 회의를 통해 합의한 인구, 경제, 제도변수 등에 대한 기본 가정에 기초해 급여지출과 적립기금의 변화 추이 등을 우선적으로 산출했다고 설명했다.
추계기간은 '향후 70년'(2023~2093년)이다. 보건복지부 이스란 연금정책국장은 "국민연금은 보통 18세부터 가입이 가능하긴 하지만, (생애주기 상) 통상 20세에 가입해서 90세에 사망한다고 치면 70년 정도가 나온다"고 말했다. 장기추계의 불확실성과 선행 계산과의 일관성도 고려됐다.
연금 재정에 직격타가 된 것은 급속한 인구구조 변화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 중 '꼴찌' 수준인 한국의 출산율은 매년 내리막을 걷고 있다. 2021년 0.81명이었던 합계출산율(가임여성이 평생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출생아 수)은 작년 기준으로 0.73명까지 꺾일 예정이다. 재정추계위는 통계청의 '2021년 장래인구추계'의 중위가정을 적용해 합계출산율이 내년에 0.70명으로 바닥을 친 뒤 완만하게 반등할 것으로 내다봤다. 2030년엔 합계출산율이 0.96명으로 오르고, 2046년 이후 1명 이상(1.21명)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장기화된 코로나19 유행으로 급감했던 혼인 건수가 예년 수준을 회복할 거라는 점, 2차 에코붐 세대(1991~1996년 출생)에 속하는 91년생이 결혼 적령기인 30대에 진입한다는 점 등이 근거로 꼽혔다.
물론 이같은 가정을 하더라도, 2050년 이후 합계출산율을 1.38명으로 설정했던 4차 재정추계에 비해서는 하락한 수치다. 반면 올해 84.3세인 기대수명은 2070년 91.2세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2093년이면 우리나라 전체인구는 올해(5156만 명) 대비 약 46% 정도 줄어든 2782만 명으로 쪼그라든다. 국민연금 가입연령대인 18~64세 인구는 3501만 명에서 1295만 명으로 줄고, 65세 이상 인구는 2050년경 2배(950만 명→1900만 명)까지 급증한 뒤 2093년 1201만 명으로 줄 것으로 보인다.
연금 재정을 뒷받침할 가입자는 줄어가는데 수급대상인 노령인구는 많아지다 보니 보험료 수입 감소와 급여지출 증가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65세 이상 인구 대비 노령연금 수급자 비율은 올해 44.0%에서 점차 불어나 2070년에는 84.2%(장애연금 및 유족연금 제외)에 달할 것이라는 게 추계위의 분석이다. 가입자 수를 분모, 노령연금수급자 수를 분자로 계산하는 제도부양비는 2078년 143.8%로 최고점을 찍을 것으로 봤다.
미래 세대의 부담은 자연히 더 커졌다. 해당연도 보험료 수입만으로 그 해 급여지출을 감당한다는 전제 하에 필요한 보험료율을 계산하는 '부과방식이용률'을 보면 예상 기금 소진연도인 2055년 기준 26.1%로, 4차 추계 시(2057년·24.6%)보다 1.5%p 상승했다.
재정추계위는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연금재정 안정화'를 위한 다양한 재정 목표를 제시하며, 보험료율 인상만으로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한 필요보험료율 수준도 계산했다. 적립기금 규모에 대한 목표 시나리오별 필요보험료율은 4차 재정계산 때에 비해 약 1.66~1.84%p 올랐다. 연금개혁이 지연된 결과라는 게 추계위 측의 설명이다.
추계기간 말인 2093년 기준 재정목표로는 △적립배율 1배 △적립배율 2배 △적립배율 5배 △수지적자 미발생 △일정한 적립배율 유지 등 5가지 시나리오가 활용됐다.
이밖에 장래인구추계를 기반으로 들어간 임금상승률, 금리, 물가상승률 등 주요 거시경제 전망은 상대적으로 영향이 크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이스란 국장은 "실질 경제성장률과 실질 임금상승률이 낮게 전망되고 금리와 물가상승률, 기금투자 수익률은 4차 대비 유사한 수준"이라며 "임금상승률의 하락은 단기적으로 보험료 수입의 감소, 장기적으로는 국민연금 급여지출 감소효과를 가져오게 된다"고 언급했다.
제도 변수에서는 일부 긍정적인 변화도 관측됐다. 국민연금 가입률과 지역가입자 징수율이 올라가고, 납부예외자의 비율은 낮아진 것이다. 이 국장은 "제도 변수는 보험료 수입과 급여 지출에 모두 영향을 미쳐 재정중립적이지만, 지출보다 수입에 미치는 효과가 먼저 나타나게 된다"고 말했다.
전병목 재정추계전문위원장은 "국민연금 재정추계 시산결과는 보험료율, 소득대체율, 가입·수급연령 등 제도 세부내용을 조정하지 않고 현행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를 가정해 전망한 것"이라며 "기금 소진연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현재 진행 중인 국회의 연금개혁 논의와 향후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 수립을 위한 참고자료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