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황정민의 첫 장편 주연작이자 '세 친구'의 주인공들이 어른이 되었다면 어떤 모습일지 20년을 가로지르는 친구들의 모습을 그려낸 '와이키키 브라더스'. 여성 주연은 물론 스포츠 영화는 더더욱 안 된다는 통념을 깨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명승부를 펼친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팀의 실화를 통해 감동을 보여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사계의 변화 속 자연에서 얻는 한 끼의 소중함과 속도전과 경쟁에서 벗어난 성찰과 힐링을 보여준 '리틀 포레스트'.
우리가 알고 있는 임순례 감독은 이른바 '상업성'이라는 틀 바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만의 색깔로 그려낸 감독이다. 장르도 소재도 다 다른 감독의 영화들이 공통점은 새로운 도전과 시도, 그 뒤의 뚝심, 그리고 인간애였다. 임 감독은 상업영화의 틀 안으로 들어와서도 자신의 철학을 놓치지 않았다.
지난 1996년 '세친구'로 데뷔해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임 감독은 한국 영화 최초 100억 원대 대작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라는 수식어를 더하게 됐다. 과연 자신의 영화 색과 상업영화의 색 안에서 어떤 균형을 찾아 나갔는지, 그리고 '한국 여성 최초'라는 새로운 수식어가 가진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봤다.
비상업적 정서와 상업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다
▷ 그동안 사실 상업영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번에 연출을 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대작 영화에 요구되는 상업성 사이에서 고민되는 지점은 없었을지 궁금하다.
임순례 감독(이하 임) : 많았다. 늘 그랬지만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건 항상 비상업적이었다. 약간 무겁거나 진지하거나 비상업적인 게 내 기본적인 정서다. 그것과 되게 큰 예산이 들어간 영화의 결과라고 하는 그사이에서의 고민과 균형점, 최저 지점, 밸런스를 찾아내는 게 굉장히 힘들고도 어려운 작업이었다. 내가 무조건 다 자본에 양보했다.(웃음)
▷ '교섭'은 국내 여성 첫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임 : 나한테는 사실 큰 의미 없는데, 개봉 때가 되니까 의미가 크게 다가온다.(웃음) 돈을 많이 들였는데, 여성 감독에게 큰돈을 맡겼는데 잘 됐다고 하는 것과 역시 안 됐다고 하는 것은 다르다. 안 됐다고 하면 피해가 나만이 아니라 나중에 후배 여성 감독에게도 갈 수 있으니 더 잘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지난 1996년 '세친구'로 데뷔한 후 지금까지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감독으로서 가진 본인만의 장점 내지 무기는 뭐라고 생각하나?
임 : 그러니까 말이다.(웃음) 어떻게 보면 긴 시간이다. 26년 정도 됐으니까. 그동안 영화마다 소재도 다르고, 형식과 결도 다른 작품을 연출했다. 바로 '리틀 포레스트'와 지금 '교섭'은 같은 감독이 맞나 할 정도로 굉장히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인정하시는지 안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친구'부터 '교섭'까지 소재나 스타일, 예산 스케일 다 다르지만 뭔가 관통하는 게 있다고 하면 한국 사회에 대한 관심이어도 좋고 애정이어도 좋다. 동시대를 사는 사람에 대한 연민 내지 관심, 이런 것들이 쭉 관통하면서 관객들도 그런 부분을 인정하고 좋아해 주시지 않나 싶다. 그래서 근근이 이어가고 있는 거 아닌가 싶고.
나도 초창기 '세친구'나 '와이키키 브러더스'만 해도 감독으로서 '영화는 이렇게 만들어야 해'라는, 좋은 말로 작가적 고집이고, 나쁜 말로 하면 자기 틀 안 영화에 대한 생각이 고착화되어 있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이후부터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 조금 열려 있다고 해야 하나. 어느 소재가 됐건, 어느 조건이 됐건, 그 시대 관객이 원하는 것에 조금 같이 발걸음하고 싶다.
재능 있는 여성 영화인에게 필요한 건 무대의 확장
▷ 감독 데뷔 시절만 해도 여성 감독은 물론 여성 스태프조차 흔치 않았던 시기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어떤 점에서 변화했다고 보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다.
임 : 내가 1993년에 스크립터를 했었다. 딱 30년 전이다. 그때는 연출부 안에서도 스크립터는 여성이 해야 한다는 성역할 고정관념이 있었다. 여성은 꼼꼼하다는 건데, 안 그런 여자가 많다. 나도 그렇고. 전체 스태프 중 여성은 스크립터 한 명뿐이고, 그때는 의상이나 분장도 남자가 많았다. 전체 스태프가 30~40명이라고 하면 여자는 3~4명 정도?
지금은 스태프의 성비가 웬만하면 50% 되는 거 같다. 어떤 영화는 60% 정도로 여성이 더 많은 경우도 있다. 젠더적인 구성에 있어서 그게 굉장히 달라진 점이다. 그리고 10년 전부터 독립 영화계나 대학 영화과 졸업 작품을 보면 여학생이나 여성 감독이 정말 좋은 작품을 많이 하고 있다. 정말 뛰어나다.
▷ 뛰어난 여성 영화인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지만 아직 활동 범위에는 제약이 있는 것 같다.
임 : 그들이 산업으로 들어오는 확률과 비중이 너무 뚝 떨어지더라.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투자와 배급 시스템의 문제가 크다고 본다. 보통 여성 감독이 장르,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보다 자기 주변의 일상, 작은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영화는 배급되어 일정 관객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또 산업으로 흡수된다 해도 큰 예산이나 상업적인 부분보다 중·저예산 연출을 하는 게 대부분이다. 지금 시대에는 재능 있는 여성 감독이 자기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는 게 더 큰 문제라 생각한다.
투자·배급이 여성에게 더 길을 열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교섭'이 여성 최초 100억 원대 대작 영화 연출작이라고 하는데, 이런 이야기가 있는 만큼 영화가 잘 됐으면 좋겠다. 이 영화가 본격 액션 영화는 아니지만 큰 규모 영화를 여성도 잘 할 수 있고, 어떤 장르의 영화라도 수용할 수 있다는 데 조금이라도 일조하면 좋겠다. 상업영화에서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 감독이 꽤 많아졌지만, 조금 더 메이저 산업으로 더 들어와야 한다. 다양성과 재능이 한국 영화를 풍요롭게 할 거라 생각한다.
▷ 매번 다양한 결의 많은 작품을 선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찍어보고 싶은 장르나 이야기의 영화가 있을까?
임 : 다음에도 기회가 있으면 장르적으로나 상업적으로 더 들어갈 수 있는 영화도 찍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하지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영화와 자본과 관객이 원하는 영화 사이 갭이 큰 감독이다. 작은 예산을 갖고 내가 하고 싶은 영화 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고, 장르적으로나 상업적으로 관객에게 사랑받는 영화도 하고 싶다.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고 기회가 되면 이런저런 영화를 다양하게 만들어보고 싶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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