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컷 리뷰]연상호 세계 '정이' 완성한 강수연과 김현주

넷플릭스 SF 영화 '정이'(감독 연상호)

넷플릭스 SF 영화 '정이'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 스포일러 주의
 
연상호 감독이 '연상호했다'는 말로 정리할 수 있겠다. 연 감독의 신작인 넷플릭스 SF 영화 '정이'는 그만의 상상력과 아이디어, 수많은 SF 영화가 가졌던 질문, 그리고 이전보다 담백해진 연출로 한국적인 감성 가득한 '연상호 세계'를 선보였다. 여기에 영원한 별이 된 고(故) 강수연과 김현주는 왜 그들이어야만 했는지 연기로 증명한다.
 
연상호 감독의 신작 '정이'는 기후변화로 폐허가 된 지구를 벗어나 이주한 쉘터에서 발생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설적인 용병 정이(김현주)의 뇌를 복제, 최고의 전투 A.I.를 개발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SF 영화다.
 
영화는 2194년, 기후 변화로 폐허가 된 지구라는 SF 영화에서 많이 봐왔던 디스토피아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미래 지구 환경 파괴와 이로 인한 우주 이주, 빈부 갈등 등 SF의 메시지들은 정이와 크로노이드를 둘러싼 환경 요소로 등장하며 지금의 우리에게 경고를 던진다.
 
넷플릭스 SF 영화 '정이'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또한 SF 영화에서 좋아하는 소재 중 하나인 사람을 닮은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하며 영화가 '인간'이라는 존재에 관해서도 이야기할 것임을 암시한다.
 
영화의 주요 소재인 인공지능 로봇 정이는 인간 정이와 똑 닮은 모습이다. 겉만 봐서는, 그리고 그가 하는 행동만 봐서는 로봇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심지어 로봇 정이는 부상당하면 고통도 느낀다. 그를 로봇이라고 인지할 수 있는 건 부상을 당해서 붉은 피 대신 하얀 액체를 흘리거나 강제로 종료될 때다.
 
'정이'는 로봇이란 소재를 중심에 두고 엄마의 이야기이자, 딸의 이야기이자, 인공지능 로봇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이를 통해 '인간'과 '존재'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이 모든 걸 위해 연합군 최정예 리더 정이(김현주)의 뇌를 복제한 로봇과 로봇의 연구를 담당하는 연구원 서현(강수연)의 관계를 가장 인간적인 연결고리 중 하나인 '모녀'로 설정한다.
 
그렇게 정이라는 로봇 설정은 과연 뇌를 복제한 로봇은 엄마인지, 내가 아는 그 사람인지, 그리고 우리는 기억만으로 구성된 존재인지, 기억은 감정을 동반하는 저장 체계인지 등의 다양한 질문과 고민의 영역으로 이어진다.
 
넷플릭스 SF 영화 '정이'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인간 정이의 뇌를 그대로 복제해 로봇에 탑재해 만든 인공지능 로봇 정이는 이처럼 인간을 그대로 닮았지만 인간은 아니다. 극 중 크로노이드 회장의 입을 통해서도 나오지만, 과연 생전 인간의 모든 기억을 담은 로봇은 뇌를 고스란히 복제한 인간일 수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존재일까. 나의 뇌를 복제해 이전하면 그건 '나'일까, 또 다른 '나'일까, 아니면 '또 다른 존재'일까. 뇌를 복제하면 기억뿐 아니라 복잡하고 아직도 미처 파헤쳐지지 못한 '감정'도 전달되는 걸까 등등 그동안 수많은 SF에서 질문했던 이야기들이 '정이'에서도 이야기된다.
 
극 중 '윤리 테스트'가 나오는데, '윤리'(사람으로서 마땅히 지키거나 행해야 할 도리나 규범)라는 것 자체가 대상이 '사람'임을 상정하는 단어다. 우리는 인공지능 로봇과 그 실험 앞에서 인간으로서의 어떤 모습을 발견하고, 어떤 모습을 유지하고픈 욕망을 지니고 있는 건지 물음이 생겨난다. 인간과 로봇을, 그것도 사람의 뇌를 그대로 복제한 뇌를 가진 로봇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이며, 그것이 윤리가 될 수 있는지 말이다.
 
이러한 질문에 하나의 답을 내리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감정'을 갖지 않은 존재인 로봇이라 할지라도 인간과 똑 닮은 존재의 고통에 무감하다면 우리가 인간을 포함한 다른 존재, 즉 우리가 로봇이나 소모품처럼 바라보는 자연과 다른 생명체에도 무감할 것이라는 걸 짐작해 볼 수 있다. 어쩌면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는 것보다, 소위 말하는 인간다움을 가질 수 있느냐, 타인의 고통에 무감할 수 있느냐가 어떠한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넷플릭스 SF 영화 '정이'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사실 '정이'는 익숙한 듯한 이야기와 '한국적'이란 이름으로 수식된 모녀 관계에 대한 의미를 묻는 등 연상호 감독이 이전 영화에서 잘했던 이야기의 반복처럼도 보인다. 아이디어는 반짝이지만, 질문을 던지고 완결로 가기까지의 과정이 새롭지는 않다.

'정이'를 그려내는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캐릭터다. 연상호 감독은 여성 캐릭터, 특히 여성 액션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그려내는 감독 중 한 명이다. 이번에는 타이틀 롤 정이 역을 연기한 김현주를 통해 '새로운 (여)전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전 '방법' 시리즈에서 정지소에게 퇴마와 액션을 결합한 새로운 캐릭터를 부여하며 성공적인 여성 캐릭터를 탄생시킨 것처럼, 그동안 김현주의 필모그래피에서 보기 힘들었던 고난도 액션 연기를 통해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지옥'에서 액션의 가능성을 보여준 김현주는 '정이'를 통해 보다 완벽한 액션으로 앞으로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여러 의미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서현 역의 강수연이다. 역사에서 정이를 '실패자'가 아닌 '영웅'으로 남기고자 하는 마음에 크로노이드의 계획에 참여하지만, 반복되는 실험 속에서 반복되는 고통과 죽음에 놓일 수밖에 없는 로봇 정이를 결국 해방시켜 준다.
 
넷플릭스 SF 영화 '정이'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이러한 서현을 그려내는 강수연은 역시 강수연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반복되는 고통을 마주해야 하는 자로서의 모습과 실험 책임자의 모습, 그리고 딸의 모습과 이 각각의 감정과 감정들의 충돌을 매우 선명하게 그려낸다. 빤할 수 있는 장면조차도 그냥 납득시키는 연기를 보다보면 왜 서현 역을 강수연이 연기해야 했는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일찍 별이 된 강수연이 더욱더 그리워질 따름이다.
 
'정이'에서 눈여겨볼 또 다른 지점은 바로 연상호 감독 특유의 감성이 어떻게 재현되는지다. '부산행'이나 '반도' 엔딩신에서 봤듯이 길게 길게 이어지며 감성을 끌어내려고 하는, 이른바 '신파'라고 불렸던 요소가 이번에는 짧게 처리되며 담백해졌다. 그렇기에 오히려 감정을 더욱더 자극하고, 이 부분만은 연 감독이 한 걸음 더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다음은 더욱더 한 발 나아간 그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98분 상영, 1월 20일 넷플릭스 공개, 12세 관람가.

넷플릭스 SF 영화 '정이' 메인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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