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세상 못따라잡는 법원…흔들리는 위상

[흔들리는 법원③]

고상현 기자
▶ 글 싣는 순서
①"최근 5년간 344명이 나갔다"…판사가 부족하다
②명예에 속고, 돈에 울고…'박봉판사' 안 한다는 '김광태' 변호사들
③변하는 세상 못따라잡는 법원…흔들리는 위상
(계속)

일과 삶의 균형, 이른바 '워라밸'은 이제 대한민국 사회의 거대한 흐름이 됐다. 돈보다 명예, 개인보다 조직을 우선시하라는 말은 이제는 구태의연한 옛말일 뿐이다.

법원도 예외는 아니다. 과거와 비교해 휴직 법관은 물론 단축 근무에 들어간 법관도 늘어났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법원의 조치는 미비하다. 현업 인력이 부족하면서 법관들의 업무 부담은 늘어났고 이는 내부적으론 인력 유출·외부인재 유치 어려움, 외부적으론 재판 지연 등 법률 서비스 저하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최근 대법원장 교체 시기와 맞물려 일부에서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 부활' 등 인사 정책 전반을 수정해 동기 부여 요소를 만들자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근본적 해결책은 처우 개선과 생활 안정"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법원도 맞이한 워라밸 시대… 그런데 뒷받침이 없다

최근 법원 내에서의 큰 변화 중 하나로 '휴직자의 증가'가 꼽힌다.

20일 CBS 노컷뉴스가 확보한 사법정책연구원 등의 자료에 따르면 해외 연수와 파견, 사법연구 등을 제외한 '단순 휴직 인원'은 2001년 3명에 불과했고 2011년까지도 두 자릿수에 그쳤지만, 2019년엔 200명을 넘어섰고 2020년에도 196명에 달했다.

육아 기간에 맞춰 단축근무에 들어간 법관 역시 2016년 4명에 불과했지만 2019년 29명, 2020년 27명까지 늘어났다.

국가 차원에서 육아 휴직을 장려하고 있고, 또 양질의 재판, 법관의 업무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 휴직자 증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문제는 휴직으로 인한 인력 공백이 메워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014년 마지막으로 개정된 현행법은 전국 법관의 정원을 3214명으로 정해 놓았다. 이마저도 이미 정원 미달이다.

단순 휴직과 함께 해외연수, 파견, 사법연구 등으로 인한 총 휴직자는 2019년 415명, 2020년엔 332명이다. 매년 400명에 가까운 법관이 재판 업무에서 떠난 상황인데, 인력 충원은 없다 보니 고스란히 남아 있는 법관들의 업무량 과중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한 고위 법관은 "판사도 놀고, 워라밸을 맘껏 챙길 수 있는 숨통을 틔워줄 필요성이 있다"라며 "그래야 더 양질의 판결도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뒤쳐진 법원에 재판 당사자도 불만…'흔들리는 법원 위상' 

법원이 시대를 따라잡지 못해 생기는 부정적 영향은 재판 당사자들인 시민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지난해 대한변호사협회가 소속 변호사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 666명 중 89%인 592명이 '최근 5년 간 재판 지연을 겪은 적이 있다'라고 응답했다. 민사재판의 경우 1심 선고까지 걸리는 시간이 '1년 이상'이라는 응답은 86%에 달했다.

형사 재판은 한 개인의 자유를 박탈할 수 있기에 신속히 재판 받을 권리와 빠른 선고를 미덕으로 삼고 있지만, 재판 지연은 법조계의 고질적 문제로 꼽힌다. 형사 재판도 형사 재판이지만, 민사 재판의 경우 재판이 늦어질 경우 당장 경제적 타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법원의 명백한 실수로 인한 재판 지연도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사건 배당 오류'이다. 사건마다 재판 개시 전 규정에 따라 배당할 수 있는 재판부가 정해져 있지만, 이를 지키지 않은 것이다. 현행법상 배당이 잘못된 재판은 절차와 재판 결과까지 무효 처리되고 처음부터 다시 진행해야한다. 배당 오류는 자연스레 재판 지연으로 이어진다.

CBS노컷뉴스와 국민의힘 장동혁 의원실이 확보한 '법원별 사건 재배당' 문건을 보면 국내 최대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은 '재판부의 단순 착오'로 인해 지난해에만 764건을 재배당했다. 2020년엔 427건, 2021년엔 604건으로 점차 증가하고 있다. 인천지방법원 역시 2020년 394건, 2021년 366건, 2022년 459건을 재배당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법원이 인력 유출은 물론 인재 유치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보니 당장 법원의 고령화로 인한 전문성을 지적하는 외부 목소리도 있다. 한 변호사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비트코인 등 분쟁과 사건이 점차 복잡해지면서 판사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많아지고 있다"라며 "법원의 전문성 약화가 아주 심각해졌다"라고 말했다.

'고법 부장' 부활 목소리에…내부선 "근본적 문제는 그게 아닌데"

결국 인력을 유지하고, 외부 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해선 '처우 개선'이 가장 시급한 대책이란 것이 대체로 공통된 의견이다. 하지만 이 역시 국회 입법의 문제여서 빠른 시일 내에 이뤄지긴 어렵다는 지적이다.

일부에선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에서 폐지된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를 부활시켜 동기 부여를 주자는 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재판연구관·행정처 심의관→고법 부장판사→법원장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부활시켜 '동기 부여 요소'를 만들자는 것인데, 대법원장 교체 시기까지 맞물리면서 최근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하지만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많다. 애초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가 폐지된 이유가 승진에 목 매는 법관 사회의 폐해 때문이었는데, 해결책 없이 원래대로 돌아가겠느냐는 지적이다. 이와 연계돼 불거진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사태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또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를 부활해 동기 부여 요소를 만든다 하더라도, 현재의 법관 처우로는 인재 유출을 막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경법원 소속의 한 판사는 "고법 부장판사 폐지는 되돌리기도 어려운 문제이고, (부활시키는 것이) 현재 시대상에 맞는 정책인지도 의문"이라며 "과거와 달리 젊은 판사들이 한 조직에서 오래 있고, 승진하는 것에서 삶의 기쁨을 찾지 않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인력 부족 등으로 과거와 비교해 늘어난 지방 근무 기간과 그로 인한 생활 불안정, 육아, 자녀 교육 어려움 등의 '진정한'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인력 유출은 계속될 것이란 목소리가 강하다.

한편, 판사 출신 국회의원들의 주도로 법관 증원 관련 법안이 제출되고는 있지만, 국회 차원의 논의는 멈춘 상태다. 더불어민주당 이탄희·최기상 의원 등이 지난 2021년 11월 법관의 정원을 현재보다 1000명 늘려 4214명까지 확대하는 법안을 냈지만, 여야 간의 다툼으로 국회가 공전하면서 아직 법제사법위원회 심사 단계에 머물고 있다.

최근 법무부 역시 2027년까지 판사는 370명을 늘리고, 검사는 220명을 증원하는 개정안을 국회에 제안했지만, 통과 여부는 높지 않은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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