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감독의 신작 '정이'는 급격한 기후변화로 폐허가 된 지구를 벗어나 이주한 쉘터에서 발생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설적인 용병 정이(김현주)의 뇌를 복제, 최고의 전투 A.I.를 개발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SF 영화다.
연 감독은 지난 12일 열린 제작보고회에서 '정이'가 영화로 나올 수 있었던 시작으로 타이틀롤의 배우가 아닌 고(故) 강수연을 언급했다.
"영화 '정이'를 완성하게 한 원동력은 '강수연'"
'정이' 이야기의 시작은 엄마의 인생을 다시 세팅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이었다. 연 감독은 강수연이 연기한 서현에게 이러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현이 자신의 엄마를 바라보는 태도가 이 영화가 가진 SF적인 질문이라고 했다.
그는 "사실 '정이'는 윤정이에 관한 이야기라 생각한다. 윤정이는 가족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갈 수밖에 없는 인물이고, 결국 사고를 당한다. 그런 어머니에게 죄책감을 가진 서현은 딸의 입장에서 어머니를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리기 위한 목적을 지녔다"며 "'나에게 부모에 관해서 다시 리셋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이 영화 안에 담겨 있다. 그게 한국적인 부분이 있는 SF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서현 역의 적임자로 떠올린 강수연으로부터 '정이'라는 이야기가 나아갈 방향이 '영화'로 정해졌다.
강수연은 '정이'에서 군수 A.I. 개발 회사 크로노이드 연구소 팀장이자 최고의 전투 용병이었지만, 단 한 번의 작전 실패로 식물인간이 된 엄마의 뇌를 복제하고 전투 A.I.를 개발하는 '정이' 프로젝트를 책임지는 서현 역을 연기했다.
연 감독은 "한국에서는 (SF를 한다면) 종합 엔터테인먼트적인 이야기여야 하는데, '정이'는 윤서현이란 인물의 사적 이야기다. 그런 면 때문에 사실 영화화에 집착하지 않고 있었다"며 "그런데 어느 날 만약 이걸 영화로 만든다면 윤서현을 누가 연기할 수 있을까 생각했고, 갑자기 강수연 선배의 이름이 생각났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고 나서부터 '정이'라는 작품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며 "강 선배께 제안하기 전부터 넷플릭스 등에 강수연 선배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찍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강수연 선배가 '정이'를 기획하고, 이 자리까지 오게 된 원동력이 됐다"고 설명했다.
'정이'에 대한 강수연의 애정은 촬영장 뒷이야기를 담은 영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수연은 연 감독과의 첫 만남에서 가장 한국적인 SF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며 "우리 '정이'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하고, 또 애정으로 봐주시길 바란다"는 바람을 전했다.
연상호에게 정이가 '김현주'여야만 했던 이유
이처럼 강수연으로부터 시작된 프로젝트인 '정이'의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또 다른 요소는 바로 타이틀 롤 정이를 누가 연기할 것이냐는 점이었다. 그리고 정이 역에는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에서 함께했던 배우 김현주가 낙점됐다.
연 감독은 김현주를 캐스팅한 이유로 가장 먼저 '그림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정이'라는 영화를 기획하면서 생각했던 그림체에 맞는 배우가 김현주였다. 김현주는 일단 되게 잘생겼다"며 "주인공의 그림체가 맞아야 영화를 만드는 데 굉장히 좋은 면이 있다"고 말했다.
정이 역할이 '김현주'여야 했던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단순히 액션을 잘하거나 연기만 잘하는 배우가 아닌, 그것도 인공지능 로봇으로서 액션에 감정을 실을 수 있는 배우가 필요했다. 연 감독은 "일반적인 '인간'을 연기하는 것과 다르다. 작동시키면 멈춰 있다가도 감정을 갑자기 쏟아내야 하는 신이 많았다. 이런 연기에 능숙할 수 있는 배우가 김현주였다"며 "'지옥'을 하면서도 순간적으로 감정을 뽑아내는 걸 잘 봤었다"고 이야기했다.
액션 역시 믿을 수 있는 배우였다. '지옥'에서도 액션 신이 많지는 않지만, 연기를 위해 김현주는 당시 엄청난 트레이닝을 받았다. 연 감독은 김현주의 노력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그는 "김현주와 작업하면 편하다. 현장에서 편하게 영화에 집중할 수 있는, '죽이 잘 맞는다'는 느낌도 있다"고 말했다.
스태프들의 경험과 노하우, 노력으로 쌓아올린 '정이'
강수연에서 시작해 김현주를 통해 완성된 라인업을 바탕으로 연 감독은 프로덕션 디자인, 촬영, 조명, 세트, VFX 등 각 팀과 유기적인 협업을 진행했다. 그렇게 한국적인 정서와 비주얼을 담아내며 '정이'만의 세계관을 구축했다.
연 감독은 "나와 오래 작업한 스태프들이 함께했는데, 다들 신이 났었던 거 같다"며 "이런 걸 해볼 기회가 많지 않다 보니, 다들 본인이 가진 능력에서도 최선의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고 말했다.
특히 "미술적인 부분에서는, 이미 그전에 한국에서 몇 편의 SF 영화를 선보이다 보니 이를 통해 쌓인 노하우가 어느 정도 정점에 올랐다는 느낌을 받았다. 덕분에 '정이'를 작업하는데 수월했던 부분도 있었다"며 "그 전에 아쉬웠던 것들에 대한 경험치와 노하우를 살려서 작업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연 감독은 어렸을 적 20세기 SF 문학사를 대표하는 작가 필립 K. 딕의 단편 소설 '사기꾼 로봇'을 감명 깊게 봤던 이야기를 꺼냈다. SF가 뭔지도 몰랐던 시절 읽었던 짤막한 이야기가 너무나도 재밌었고, 또 신기했다. 연 감독은 '정이'를 볼 시청자들이 어릴 적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느끼길 바랐다.
"그때 느낀 재미가 있거든요. '정이'를 만들면서 예전에 봤던 단편을 영상으로 만든다는 기분으로 만들었어요. SF에 생소한 분들도 '정이'를 통해서 어릴 때 SF를 처음 접한 소년 연상호가 가졌던 느낌을 받으면 좋겠어요. 또 배우들의 앙상블도 역시 이런 소재에서 보기 힘든 앙상블인 만큼 재밌게 봐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