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와 관련해 최근 몇 달 새 가장 많이 언급된 열쇠말은 '속도감'이다. 강제동원 문제가 한일관계의 최대 걸림돌이기에 어떻게든 빨리 풀어야 한다는 윤석열 정부의 시각이 투영됐다.
정부와 대통령실은 지난해 7월 첫 민관협의회에서 '속도감 있는 진행'을 강조한 이후 프놈펜 한일 정상회담 등 계기마다 '밀도 있는 협의'나 '긍정적 흐름' 등의 표현으로 변주하며 속도를 강조해왔다.
이는 어떤 식으로든 타결이 임박했음을 기정사실화하는 효과를 낳았다. 실제로 새해 첫날부터 일본 산케이 신문은 한국 정부가 이르면 이달 중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책을 발표하겠다는 의향을 밝혔다고 보도하며 군불을 땠다.
외교부는 부인하고 있지만 12일 국회 토론회를 끝으로 문제 해결의 마무리 수순에 들어섰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미 유력한 해법도 나와 있다. 우리 기업의 기부금으로 피해자들에게 배상 판결금을 대신 지급하고 일본 측의 '성의 있는 조치'를 기다리는 것이다.
강제동원 해법, 오늘 토론회 끝으로 마무리 수순…정부 일방통행에 파열음
하지만 한일관계 개선을 강조하는 전문가들조차 거의 한 목소리로 정부가 너무 서두르는 것 같다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손열(연세대 교수) 동아시아연구원 원장은 신년 특별논평에서 "강제동원 문제에 대해 반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 일본 정부에 한국 정부가 전향적으로 나갈 경우, 피해자 등 국민적 반대에 부딪힐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따라서 천신만고 끝에 양 정부가 강제동원 문제 해법에 합의하더라도 희망하는 만큼 신뢰가 회복되거나 미래지향적 협력의 물꼬가 트이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물론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와 최악의 불편한 관계를 수년째 지속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한국의 정권교체를 계기로 초기의 동력을 살려 과감히 관계 개선에 나설 필요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정부가 가속을 넘어 과속이 걱정될 만큼 일방통행하며 곳곳에 파열음을 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지난해 민관토론회는 피해자 측의 반발로 초반부터 반쪽 운영이 됐다. 당초 한일의원연맹과 공동 개최하기로 했던 12일 국회 토론회도 야당 의원들의 불참에 빛이 바랬다. 야당은 외교부가 사전 협의 없이 들러리 세우려 했다고 비판했다.
이 과정에서 지난해 8월 정부 해법이 발표될 것이란 설이 제기된데 이어 11월에는 윤덕민 주일대사가 대통령 방일 가능성을 거론하는 등 혼선이 빚어졌다.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에 대한 서훈이 갑자기 무산된 것도 석연찮았다.
北위협 등 사정 있지만 대원칙이 더 중요…'가치 공유' 日 설득 왜 못하나
이런 난맥상은 정부가 피해자들과의 교감 없이 밀어붙인 결과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외교부는 박진 장관이 피해자들을 찾아가 큰절까지 해가며 소통했다고 하지만 정작 피해자의 입장은 무시돼왔다.
피해자 측은 정부의 해법에 대해 "일본 정부가 2018년 대법원 판결부터 일관되게 주장해 온 '한국이 해결하라'는 요구가 그대로 관철된, 0대 100의 외교적 패배이자 참사"라며 전혀 수긍하지 못하고 있다.
한 외교소식통은 "피해자 측 반발이 빤한데도 정부가 왜 이리 조바심 내듯 서두르는지 모르겠다"며 "정부 쪽 전문가들도 부담을 느껴 발을 빼고 싶어 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정부로선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지속적으로 고조되는 가운데 한일 안보협력이 더욱 필요해졌다는 고민이 있다. 피해자들의 고령화와 함께 일본 기업 자산 현금화(강제매각)라는 시한폭탄 초침도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위협은 일본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만 반드시 더 크게 양보해야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현금화도 중요한 고려 사항이긴 하지만 급하다고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와 관련, 스웨덴 정부가 지난 8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을 위한 튀르키예 정부의 요구 조건을 대법원 판결을 이유로 거부한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있다. 스웨덴의 안보 우려가 한일 과거사 문제보다 결코 작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고충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사법부 존중 및 삼권분립, 피해자 중심주의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원칙이다. 정부의 말마따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일본이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일본이 잘못됐든 우리 외교력에 문제가 있든 둘 중 하나이다.
"미봉적 처방은 반드시 동티"…밀어붙이면 '제2의 위안부 합의' 후폭풍
사실 정부의 유력한 해법도 '병존적 채무 인수'라는 법 기술이 추가된 것 외에는 전혀 새롭지 않다. 오히려 과거에 비판 받았던 '문희상 안'(한일 양국 기업과 국민, 정부의 공동 참여)보다도 후퇴한 것이다.
그나마 병존적 채무 인수라는 방식도 채권자(피해자) 동의를 얻을 필요가 없다는 정부 설명과 달리 법리 공방을 야기할 개연성이 크다.
변호사 출신인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6일 "병존적 채무인수를 얘기하는데 이 역시 수많은 갈등 여지가 있다"며 "일본 정부 상대 구상을 포기하는 순간 관련자들은 배임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게 법조계 일반론"이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의 트라우마를 잊은 듯 또 다시 실패할 확률이 높은 모험에 나섰다.
가해자인 일본은 차분하고 무관심하기조차 한데 피해자인 한국은 정부와 피해자 간에 대립하고 분열하며 오히려 안달복달하고 있다. 이런 형세를 간과하고 정부 해법을 밀어붙인다면 후폭풍을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이현주 전 오사카 총영사는 최근 발간된 '외교' 수록 글에서 "미봉적 처방은 국민이 반발하고 나중에 반드시 동티가 난다"며 "정부는 피해자들과의 소통뿐만 아니라 정치적 합의를 추구하고 법적 요건과 절차를 존중하는 해결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과거에 한일관계가 좋았다고 할 수 있던 시절은 없으니 '회복'하고 '복원'할 것도 없다. 국가의 관계는 '진화'할 뿐"이라면서 '이웃 간 편의적 공존' 수준의 관리가 현실적인 최대 기대치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