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413채 빌라왕' 지상파 부동산 예능 출연…'전세 사기' 악용

서울청 금수대, 최근 413채 '깡통전세' 임대사업자 구속
과거 유명 부동산 관련 TV프로그램 출연…본인 홍보 활용
출연 전 같은 빌라 내 다른 층 이미 '깡통전세'로 소유도
방송사 측 "알 수 없었던 부분" 해명

연합뉴스

이른바 '깡통전세' 수법을 통해 임차인들로부터 수백억대 보증금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된 '빌라왕' 이모(31)씨가 범행 기간 한 지상파 TV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프로그램은 의뢰인의 조건에 맞는 부동산 매물을 출연자들이 찾아 추천해 준다는 '부동산 매물 소개' 형식으로, '전세사기범'인 이씨에게는 범죄를 위한 홍보 수단으로 악용됐다.

특히 이씨는 방송에 출연했을 당시 TV를 통해 홍보한 빌라의 한 매물을 '깡통전세' 수법으로 매입한 상태여서 사기 범죄가 진행되던 시점이었다. 방송에 '중개보조원' 신분으로 출연한 이씨는 같은 빌라 내 다른 매물을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사실상 본인의 범죄 행위와 연관된 부동산 매물을 방송을 통해 홍보한 셈이다.

그는 당시 방송 출연 사실을 본인 SNS에 올리는 등 홍보 용도로도 사용했다. 이씨는 413채의 빌라를 소유하면서 임차인들로부터 약 310억원의 보증금을 편취한 혐의로 최근 구속됐다. 방송을 통해 높아진 인지도·신뢰도 또한 이씨의 대범한 범죄 행각에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방송사 측은 "(이씨의 범죄 행각을) 알지 못했고, 처음 듣는 사실"이라는 입장이다.

전세사기범, 범행 기간 '전셋집 매물 안내' 방송 출연…홍보 악용


10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최근 사기 혐의로 구속된 임대사업자 이씨는 지난 2019년 5월 19일 A방송국의 부동산 관련 예능 B프로그램에 출연했다. 해당 회차는 의뢰인 부부가 조건에 맞는 전셋집을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중개보조원 신분이라 소개된 이씨는 출연진들을 한 빌라 2층으로 안내했고, 출연진들은 해당 매물의 특징과 장·단점을 의뢰인 및 시청자들에게 소개했다.

하지만 방송됐던 빌라 전체의 등기부등본을 확인한 결과, 해당 빌라 5층의 한 세대가 방송 전부터 이씨의 소유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해당 세대는 이씨가 '깡통전세' 수법으로 사들였던 것으로 파악됐다. 현재 해당 빌라는 이씨의 세무 체납으로 국가에 압류됐고, 임차인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등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종합하면 이씨는 '깡통전세' 수법으로 빌라 한 세대를 본인 명의로 구입한 뒤, 같은 빌라 내 다른 세대 매물을 중개보조원 신분으로 방송을 통해 홍보한 셈이다.

스마트이미지 제공

더불어 이씨는 방송 출연 사실을 본인 SNS에 올려 인지도와 신뢰도를 높이는데 활용했다. 과거 이씨의 SNS에는 본인 소개글에 임대사업 법인명 'OO하우징'이 적혀 있었고, 당시 방송에 함께 출연했던 연예인들과의 기념사진을 게시하는 등 홍보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현재는 비공개 처리돼 있다.

특히 이씨가 출연한 회차는 의뢰인이 '전셋집'을 구한다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깡통전세를 통한 전세사기 행각을 벌여온 이씨에게는 홍보 수단으로 활용하기에 알맞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씨의 범행은 2018년 9월부터 올해 4월까지 이어지는 등 기간이 길고, 피해자도 100여명이 훌쩍 넘는 등 규모가 점차 확산됐다.

이 때문에 '방송을 통한 홍보가 이씨 범죄 행위에 도움을 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에 따르면 이씨는 서울·경기 등 수도권 일대에서 총 413채의 빌라를 소유하면서 임차인 118명으로부터 보증금 명목으로 312억원을 편취한 혐의를 받는다.

경찰 전수조사 결과 413채 전부가 '깡통전세'인 것으로 확인됐지만, 피해 사실을 진술한 이들은 118명에 그쳐 이들에 한해서만 입건 수사가 진행됐다. 보증보험 가입 등을 이유로 피해 내용을 진술하지 않은 이들까지 합하면 실제 피해자는 수백명에 달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 B프로그램을 방영한 A방송사 관계자는 "당시 이씨가 프로그램에 출연한 건 맞지만 제작진도 이씨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건에 연루됐는지 알 수 없었던 부분"이라며 "출연분에 대해 이씨가 어떻게 활용했는지도 역시 알 수 없다. 범죄에 연루된 부분이다 보니까 (입장을 말하기가) 조심스럽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이후 프로그램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중개보조원은 제외하고 공인중개사 위주로만 섭외를 해왔다"며 "최근 1년 넘는 기간 동안 B프로그램에 중개보조원이 출연한 적은 없다"고 덧붙였다.

413채 빌라왕도, 1139채 빌라왕도 '중개보조원'…"관리·감독 부실"


이씨는 2018년 6월쯤 'OO하우징'이라는 법인을 설립한 뒤 직원들을 모집, 임대차수요가 높은 중저가형 신축 빌라를 주 대상으로 '동시진행'이 가능한 매물들을 물색해 범행을 저질렀다. 동시진행이란 우선 전세 계약을 맺은 뒤 임차인이 지급하는 보증금을 매매대금으로 이용해 계약금 지급과 동시에 매수인에게 소유권을 이전하는 방식이다.

이후 전세 계약이 만료될 때쯤 임차인이 보증금을 돌려달라고 하면 '돈이 없다'고 버티면서 보증금을 편취하는 게 '전세사기'의 대표적인 수법이다. '무자본 갭투자'로고도 불리며 이른바 '깡통전세'로 널리 알려져 있다.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주택도시보증공사 서울서부관리센터 악성임대인 보증이행 상담창구에서 전세보증금 사기 피해자들이 상담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똑같은 방식으로 빌라 1139채를 소유해 '빌라왕'으로 불리다가 최근 숨진 김모(42)씨 또한 이씨와 같은 '중개보조원' 신분이었다. 중개보조원이란 공인중개사가 아닌 자로서 개업공인중개사에 소속돼 중개 대상물에 대한 현장안내 및 일반서무 등 중개업무와 관련된 단순 업무를 보조하는 사람을 말한다.

부동산 업계에서는 암암리에 중개보조원들이 불법으로 공인중개사 역할까지 대행하고 있는 데다가 계약 성사 건당 수수료를 받다 보니 무리한 알선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전세사기의 유혹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이씨와 김씨 모두 중개보조원을 하면서 '무자본 갭투자' 방식을 체득했고, 종국에는 '빌라왕'까지 이르게 됐다.

한 공인중개사 C씨는 "공인중개사가 사무실을 개업해 놓고 그 밑에 중개보조원 여러 명을 데리고 수당제로 일을 한다. 그 사람들이 (부동산 업계의) 물을 많이 흐린다"며 "잘못을 하더라도 고용인인 공인중개사가 책임을 지게끔 돼 있다 보니까 자기 책임이 없어서 중개 사무에 관한 윤리 등이 없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건국대학교 부동산학과 조주현 명예교수는 "분양할 때 중개보조원이 가서 '건당 얼마' 이런 식으로 암암리에 받는다. 그러다 보니 무리하게 판매를 하게 되고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며 "보조원들이 그러다가 '이거 쉽네'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서 부동산 계약 관련 지식을 갖고 사기를 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의 관리·감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현재 중개보조원이 되려면 공인중개사협회 사이트에서 4시간 동안 동영상 강의만 이수하면 된다. 별도의 시험도 없는 데다가, 자격증 취득 이후 연수도 없다.

조 명예교수는 "미국에도 중개보조원 개념이 있는데, 자격에 대한 엄격한 제한이 있다. 중개사 시험보다는 약하지만 채워야 하는 과목·학점·기간이 있는 등 일정한 지식을 갖고 할 수 있도록 한다"며 "중개보조원에 의한 사고가 실제로 제일 많이 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관리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조언했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중개보조원 제도 개선의 필요성은 우리도 인식을 하고 있다"며 "교육 관련해서도 개선을 하려고 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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