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노조 활동을 들여다볼 수 있는 노조 회계 공시시스템을 노동정책의 제1의 우선과제로 삼았지만, 실제 성과로 이어질 지 의문이 제기된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9일 업무보고에서 올해를 '노동개혁 원년'으로 선포하며 3대 중점과제 중 하나로 노동개혁을 꼽았다.
나머지 2개 과제가 노동정책 전반을 아우르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와 고용 문제를 대비하는 '노동시장 불확실성에 선제적 대응'인 점을 고려하면 3대 과제 중 첫째인 '법치 기반의 노동개혁'이 정책 방향의 핵심이다.
특히 노동 개혁 과제 중에서도 '노조 회계 투명성 제고'가 가장 첫머리에 놓였다. 정부는 오는 3월 노동조합 회계감사원에 관한 규제를 강화하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시행령 개정 작업에 착수하고, 더 나아가 올 3분기까지 '노동조합 회계 공시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다.
노조 재정 투명성 논란은 지난해 12월 한덕수 국무총리가 "노조활동에 대해 햇빛을 제대로 비춰서 국민이 알 수 있게 해야 한다"며 포문을 열었다. 당시만 해도 한 총리의 발언은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와 조율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어 윤석열 대통령이 "노동조합에 대한 회계 공시시스템 구축을 검토하라"고 지시하며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이처럼 노조 회계를 문제삼는 명분으로 그동안 노조가 조합비를 '깜깜이 운영'으로 일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노조부패는 공직부패, 기업부패와 함께 우리 사회에서 척결해야 할 3대 부패의 하나"라며 노조의 재정 비리를 기정사실화하며 맹비난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의 주장과 달리 현행 노조법에는 이미 노조의 재정 투명성을 확보하도록 다양한 의무를 부여하는 조항이 마련되어 있다.
노조법 11조에는 노조의 규약에 '조합비 기타 회계에 관한 사항'을 반드시 담도록 하고 있고, 14조에는 재정 장부·서류를 사무실에 비치하며 3년 동안 보존하도록 하고 있다.
또 25조에는 6개월마다 1회 이상 노조의 모든 재원 및 용도, 주요 기부자의 성명, 현재 경리 상황 등에 대한 회계감사를 실시하고 내용과 감사 결과를 전체 조합원에 공개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아울러 회계감사원이 필요하다고 보면 노조 회계감사를 실시해 결과를 공개할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실제로 양대노총은 이미 국고보조금에 대해 외부 회계감사를 실시하고 조합비 운영 내역을 조합원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게다가 양대노총은 지도부가 조합원에 의해 직접 선출되고 있고, 이를 놓고 노조 안의 다양한 정파 조직이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어 내부 견제 장치가 작동하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다만 정부는 상당수 노조가 회계감사원을 외부 인사가 아닌 노조 내부 간부가 맡아 전문성·투명성이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노조법 시행령 개정 작업 역시 여기에 방점이 찍힐 것으로 보인다.
더 큰 문제는 노조 회계 공시 시스템이다. 윤 대통령은 금융감독원의 전자공시 시스템인 '다트(DART)'를 거론하며 노조도 이처럼 재무상태·회계상황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문 자체가 노조의 개념부터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산이라는 것이 노동계 및 전문가들의 일관된 지적이다.
애초 위의 노조법에서 노조 스스로 회계감사를 실시하고 조합원에게 결과를 공개하도록 의무화한 것 자체가 노조 및 조합원들이 국가·경영진 등 외부로부터 독립돼 자주적으로 재정을 운영하도록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트 공시 대상인 기업의 경우 일반 시민들이 시장에서 투자자, 채권자로 연관될 수 있지만, 노조는 노동자 조합원들이 자주적으로 단결한 조직으로 기업과 성격이 아예 다르다. 노조가 조합원에게 회계 정보를 투명하게 알릴 필요는 있지만, 조합 외부로 이를 알려야 할 의무는 없는 이유다.
더구나 다트 공시 대상인 기업은 상장 기업이거나, 비상장사 중에서도 매출액 100억 원 이상, 자산 120억 원, 부채 70억 원 등 요건 가운데 2개 이상을 충족해 외부감사를 받아야 하는 기업들이다.
개별 단위·산별노조는 둘째 치고 한국노총·민주노총 차원으로 놓고 봐도 이러한 요건을 만족하기 어렵다. 중소기업은 규모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공시하지 않으면서 노조에게 회계 정보 공시 의무를 부과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노동부 권기섭 차관도 업무보고 사전브리핑에서 노조에게 공시 참여를 의무화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강행규정은 아니기 때문에 자율적으로 공시를 하도록 해야 될 것"이라고 인정했다.
이 때문에 정부는 공시 대상 등을 담은 노조법 개정안을 다음 달 중 발의할 계획인데, 바꿔 말하면 공시시스템을 구축하더라도 법 개정 없이는 노조에게 공시를 강요할 수 없는 상황이다. 노조 스스로 공시에 참여할 가능성이 사실상 '제로(0)'인데다 여소야대 국면으로 법 개정이 어려운 점을 고려하면 실제 노조의 회계 공시가 이뤄질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제기하는 '깜깜이 회계' 의혹 자체도 별다른 실체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현재 노동부는 자율점검 기간을 부여해 조합원 1천명 이상 단위 노조와 연합단체 253곳에 재정 관련 서류를 제대로 보존하고 있는지 확인 중인데, 이는 사상 처음으로 이뤄졌다. 즉 조합원 등의 신고 등이 따로 없는 상황에서 현재 정부도 노조의 회계 비리 의혹의 명확한 증거는 잡고 있지 않다는 말인 셈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노조 재정 문제를 거듭 제기하며 회계 정보를 확인하겠다고 나선 데 대해 정치적 이유가 다분하다는 것이 노동계의 반박이다. 노동개혁을 추진하기에 앞서 노조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보수층 결집을 노리는 전략이라는 주장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노동계 인사는 "만약 회계 장부를 샅샅이 조사하면 단위노조 차원에서 간부가 조합비를 개인적으로 사용하거나, 다소 극단적인 정치적 성향을 가진 단체에 연대기금을 전달하는 등 '자극적인 사례'가 발굴될 수도 있다"며 "이 경우 노조 내부에서 갈등이 빚어질 수 있기 때문에 정부도 이를 통해 '노조 흔들기'를 노리고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조·노동자'의 대립항이 '기업'이 아닌 '사용자'인 점을 감안하면, 노조의 회계를 공시하려면 경총, 전경련 등 경영자단체의 회계도 공시해야 한다는 반박도 나온다.
한국노총 이지현 대변인은 "노동조합의 회계로 꼬투리를 잡아서 노동조합에 망신을 주겠다는 것이 고용노동부의 주요업무 1순위라는 것이 한심하고 어이없다"며 "정부와 대통령의 수준이 한없이 부끄럽다"고 밝혔다.
이어 "이왕 회계 상황을 공개하겠다면 종교단체와 경제단체 등 우리나라 모든 단체에 대해 성역없이 집행하는 것이 윤석열 정부가 말하는 공정과 법과원칙에 부합하는 것임을 잊지 말라"고 꼬집었다.